문/50대 후반으로, 조그만 사업을 하는 남편 사무실에서 일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사업이 어려울 때를 대비해 돈을 조금씩 모아두었는데, 모두 5,000만원 정도 됩니다. 은행금리는 낮고 부동산 가격은 오르고 해서 이번 기회에 제 돈에 여윳돈을 합쳐 전세를 끼고 아파트를 하나 구입하려고 합니다.그런데 남편에게 제 돈을 이야기해야 할지 말지, 고민입니다. 남편은 제가 나서는 것을 딱 싫어할 뿐 아니라, 딴 주머니까지 찼다고 오해할 지도 모릅니다. 돈 때문에 부부사이가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고요.
(종로구 혜화동 김씨)
답/젊어서는 부부 두 사람이 한 몸, 한 통장으로 정신없이 사랑하며 살지만 중년이 되면 어느 한쪽이 돈을 관장하게 됩니다. 50대가 되면 돈을 쥔 쪽이 집안의 실력자가 되며, 타 쓰는 쪽은 그때마다 용도설명을 하자니 모르는 사이에 비굴해지고 분해집니다.
남편이 봉급생활자면 대부분 아내가 돈을 관리하지만, 사업가인 경우는 일반적으로 남편이 직접 관리합니다. 그래서 돈관리를 놓친 약자쪽에서는 실추된 자존심을 조금이나마 건지기 위해서, 자주독립적으로 쓸 용돈마련을 위해서, 또는 비상시에 울고 올 상대를 호통을 치면서 구제한다는 고소한 복수환상 속에서 딴 주머니를 차게 됩니다.
장년층 남자 술자리에서 곧잘 나오는 말 하나가 "멍청이처럼 보이는 우리 마누라도 응큼하게 딴 주머니를 차고 있을걸! 그래 나는 안심이네"입니다. 아내를 강자로 모신 봉급생활자인 남편들도 상당수가 수당 같은 것을 아내 몰래 '삥땅'해두고 있지요. 예컨대, 남자 대학교수들은 흔히 원고료나 강연료, 인세 일부를 연구실 책갈피 여기저기에 끼어두고 있지요.
사업하는 남편을 사무실에 나가 직접 돕는 댁 입장에서, 그리고 그 연세에서 그 정도의 비자금을 지니신 것은 당연합니다. 공연히 죄책감을 가지실 필요가 없습니다. 남편은 이혼을 꿈꾼다고 오해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 그 양반은 벌써 눈치를 채고, 오히려 속으로는 느긋해 할 지도 모릅니다.
5,000만원은 그대로 가지고 계십시오. 남편에게는 여윳돈에다 돈을 빌려 아파트를 사자고 제안해 보시고, 핀잔을 주면 운명이거니 하고 포기하십시오. 댁이 비자금을 쓰는 순간 그 돈은 더 이상 비자금이 아니게 되고, 집값이 뒤에 오른다 해도 댁은 마음의 균형이 무너져 불안과 우울증이 올 것입니다. 남편 성격이 변하지 않을터이니 그렇지요.
/조두영 서울대 의대 신경정신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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