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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들의 해방구 종묘공원

입력
2002.10.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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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 하늘이 희붐해지기 시작한 27일 오전 6시30분. 두툼한 생활정보지를 든 노인들이 하나 둘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서울 종로구 훈정동 90 종묘공원 광장. "일찍 나오셨네. 아침은 자셨소?" "그럼요. 며느리가 잘해요." 잔디밭 경계석에 나란히 앉았지만, '며느리가 잘한다'는 묻지도 않은 말의 뜻을 새겨 들을 수 있을 만큼 서로 통한다는 듯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사위가 밝아지면서 단잠에 빠졌던 노숙자들이 공원 예제서 몸을 추스르고, 종묘공원도 노인들의 나라로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오전 10시, 1만2,700평 광장의 목 좋은 벤치와 잔디밭은 줄잡아 2,000명이 넘는 노인들로 엉덩이를 비집고 들 자리조차 찾기 힘들었다.

▶종묘- 노인들의 공화국

종묘광장은 구역 구분이 확연하다. 북서쪽 솔숲 광장은 '바둑·장기파'들의 영역. 70대로 보이는 한 노인이 "장기 두실 줄 아시오?"라며 운을 떼자 옆에 앉았던 노인이 '쌀말께나 주고 배운 실력'이라며 대꾸했다. 판이 시작되고 순식간에 10여명의 훈수꾼이 몰려들었다. 장기판 대여료는 하루 1,000원. 시간이 흐르면서 훈수꾼이 선수로, 선수가 훈수꾼으로…. 고성(高聲)과 홍소(哄笑)가 어우러진 '판'이 어느새 50여 개를 넘어서더니, 광장 그늘도 모자라 잔디밭 나무 밑까지 진출하는 패도 생겨났다. 시계탑이 있는 동쪽 숲길은 '유흥파'들이 둥지를 트는 곳이다. 두 노인이 막걸리 한 통과 3,000원짜리 삶은 돼지고기 한 봉지를 마주하고 앉았다. "마나님은 차도가 좀 있으신가. 어서 털고 일어나야 할텐데" "몰라, 요즘은 며느리 눈치가 보여서…, 그냥 빨리 갔으면 좋겠어." 그의 푸념이 이어졌다. "요즘은 소화도 잘 안돼. 할망구가 차려줄 땐 반찬이 없어도 먹을 만 했는데." 출가한 아들·딸 다섯을 뒀지만 '성가셔서' 혼자 지낸다는 맞은 편 노인은 "그래도 자넨 눈칫밥이라도 챙겨주는 사람이 있지 않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개중에 거품 맥주로 목을 추기는 하이칼라 노신사도 있지만 대개는 건빵이나 계란과자(500원) 안주에 막걸리·소주 술판. 한 노인은 "맥주거나 소주거나 고단하고 외로워서 마시기는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묵은 열정의 해방구로

한 봉사단체가 제공하는 무료 급식으로 식사를 마친 오후의 광장은 취기와 객기로 넘친다. 이 곳 노인들이 '정치 일번지'로 명명한 국악당 앞 뜰에서는 '공원 정담(政談)'이 뜨거웠다. "안 받을라는데 자꾸 주더라는 거여. 아그들이 순진혀서 생긴 일이제. 난중에 이자까지 질러서 도로 다 돌려줬다는구만." 대통령 일가 비리문제로 시작된 토론이 의약분업으로 비화했다. "의약분업만 해도 그려. 정부가 수십번 여론조사를 허고 시작한 거여. 백성들이 머리가 안 돌아가서 말썽이랑게." 한 켠에 비껴 나 앉았던 한 노인은 "정치 일번지는 벌써 '여당(호남)' 독무대"라며 "거기서는 말조심해야 한다"고 귀띔했다.

"밥 잡쉈어? 어깨 쑤시는 건 좀 어때?"라고 물으며 미색 양복에 중절모까지 얹은 노인 곁을 꿰찬 50대 아주머니가 손가방에서 드링크 하나를 꺼내 든다. 이른 바 '박카스 아줌마'다. 잠시 뒤 노인이 5,000원짜리 지폐를 꺼내자 아줌마는 "이것밖에 없어? 오늘은 맥주도 한 잔 못하겠네?"라면서 일어선다. 박카스 값(2,000원)을 뺀 거스름돈 3,000원을 되돌려준 아줌마는 돈 아껴 쓰시라는 자상한 '충고'까지 건넨 뒤 자리를 옮겼다. 40대 중반∼50대 후반의 박카스 아줌마는 줄잡아 30여명. 경기 안산에 산다는 한 노인은 "돈이 있겠다 싶은 노인에게는 '연애'를 제안한다"며 "등급이 있어서 '봉사료'가 1만원부터 4만원까지 다양하다"고 설명했다. 그 때 뒤쪽에 앉았던 노인이 불쑥 끼어 들며 "친구가 여자랑 놀다가 병이 옮아 며느리에게 쫓겨날 뻔 했다"며 흥분했다.

▶내일 해는 다시 뜨지만

오후 4시께, 시계탑 뒤편 잔디밭에 '이동 캬바레'가 떴다. 서울 효자동에 산다는 한 노인이 직접 개조한 50㎤ 세발 스쿠터. 카오디오 데크 2개와 스피커에서는 민요와 트로트가 번갈아 쿵짝대고, 안장을 들자 100여 개의 테이프가 그득하다. 순식간에 20여명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어깨를 덩실거리며 모여들고, 노인은 짐받이에 싣고 온 소주를 한 잔씩 권한다. 춤꾼들이 1,000∼2,000원씩 쥐어주는 돈은 술값 겸 배터리 값이다. 한 켠에서는 두 노인의 멱살잡이가 시작됐다. 육두문자도 예사, 싸움도 예사라고 한 노인은 말했다. 오후6시를 넘기면 종묘공원도 완연한 파장 분위기. 장기를 두던 두 노인은 여기 저기 판을 기웃거리고, 이동캬바레 노인도 테이프를 챙긴다. 박카스 아줌마들의 끈적거리는 시선을 뒤로 하고 종로3가 지하철 역사로 사라져가는 노인들이지만 해가 뜨면 또 숙명처럼 이 곳을 찾아 들어 남은 열정을 불태우며 서로를 통해 위안을 얻을 것이다. 자리를 뜨던 한 노인은 "서로 만날 날도 불과 4,5년밖에 안 남았다"고 말했다. 동네마다 널린 노인복지회관과 경로당을 마다하고 노구를 이끌고 기어코 모이는 것도 눈치 안보고 서로를 껴안을 수 있는 곳이 얼마 없기 때문인지 모른다.

10월은 문화관광부가 정한 '경로의 달', 2일은 '노인의 날'이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상당수 일할 기력 남아 장기두며 소일 안쓰러워"/석촌호수"커피아줌마"가 본 노인들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송파나루공원) 서호(西湖). 지하철 잠실역과 석촌역에서 걸어서 10분이면 닿고, 인근에 무료 급식소가 6곳이나 있는데다 공기 맑고, 롯데월드 등 구경거리도 많다는 소문이 나면서 평일에도 200여명이 넘는 노인들로 북적인다.

20년 가까이 이 곳에서 커피 행상을 해서 5남매를 키웠다는 '커피 아줌마' 연화엄마(59)의 마케팅 수단은 장기·바둑판 40개다.

오전 10시께부터 모여드는 노인들이 미리 공원 벤치에 쌓아 둔 바둑판을 가져다 판을 벌이고, 차를 마셔주는 방식의 거래가 이뤄진다. 커피와 국산차 10여종 등 주문대로 타다 주고 받는 돈은 한 잔에 500원.

"며느리와 사이가 나빠 아들 출근하자마자 나와 퇴근시간에 맞춰 댁에 들어가는 노인도 있습니다. 열에 서넛은 가정에 문제가 있을겁니다." 연화엄마는 "노인들 상당수는 아직 한창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며 "일거리를 못 찾아 온 종일 장기 알을 매만지는 걸 보면 안쓰럽다"고 말했다.

그때 멀리서 '공원순찰' 푯말을 단 자전거 한대가 미끄러지듯 다가선다. 행상 단속이 뜬 것이다. "공원 안으로는 안 들어오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느냐"고 다그치자 주변에서 연화엄마 편을 들고 나선다.

한 노인이 "구청에서 커피 타다 나르고 장기판 빌려줄거냐"고 따지자 다른 노인이 나서 "이건 대통령도 못 막아"라며 거들었다.

"봄에 벌어 여름을 나고, 가을 벌어 겨울을 납니다. 날씨가 추워지면 노인들도 잠실역 지하 만남의 광장이나 다른 곳으로 옮기거든요." 연화엄마는 "요즘에는 하루가 다르게 힘이 드는 게 나도 노후를 위해 장기나 배워둬야겠다"며 좌판을 주섬주섬 거둬들였다.

/최윤필기자

사진=홍인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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