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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영원한 청년 이만섭(56)국민당 총재시절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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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영원한 청년 이만섭(56)국민당 총재시절⑩

입력
2002.10.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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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헌 문제로 맞서 있던 여야는 1987년 1월15일에 터진 대형 사건으로 또 다른 대치 상황에 빠져 들었다. 바로 '서울대생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다. 그 날 당사에서 석간 신문을 뒤적이던 나는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제목의 기사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구체적인 내용은 나와 있지 않았지만 십중팔구 예사롭지 않은 죽음이라는 직감이었다. 다음날 경찰은 "취조 도중 책상을 주먹으로 '탁' 치며 혐의 사실을 추궁하자 박 군이 갑자기 '억'하며 책상 위에 쓰러졌다"고 발표했다. 어처구니 없는 얘기로 국민의 의구심만 증폭시켰다. 이 사건으로 결국 김종호(金宗鎬) 내무장관과 강민창(姜玟昌) 치안본부장이 경질됐다.박종철군 사건에 대한 국민의 원성은 정권 뿐만 아니라 국회에도 쏟아졌다. 국민의 인권이 이렇게 무참하게 짓밟히고 있는데도 여야는 자기 이익만 앞세우며 싸움질을 거듭하고 있다는 꾸지람이었다.

여론의 질타가 거세지자 3당 대표는 2월18일 저녁 국회 귀빈식당에서 자리를 함께 했다. 주요 의제는 인권 문제와 임시국회 소집이었다. 나는 무조건 국회부터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때에 국회 소집에 조건을 붙이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이 자리에서 국회 소집에 무조건 합의합시다. 국민을 격분시키는 일이 터지는 것도 근본적으로 개헌 작업에 진척이 없기 때문이니 이번 국회에서는 인권 문제는 물론 개헌 문제도 집중 논의하는 게 좋겠습니다."

한창 몰리는 입장이었던 민정당의 노태우(盧泰愚) 대표는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말을 삼간 채 주로 개헌에 대해 얘기했다. "헌법특위가 구성된 지 7개월이 지났는데도 아직 개헌안 심의조차 못하고 있으니 이번 국회에서 반드시 특위를 정상화해 개헌 문제를 논의하기로 합시다."

반면 신민당 이민우(李敏雨) 총재는 인권 유린 사태에 초점을 맞췄다. "이번 임시국회는 인권 문제만을 의제로 해 소집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 국정조사를 실시하고, 인권특위의 상설화를 제의합니다." 결국 3당 대표는 임시국회를 열어 개헌 특위를 조기에 정상가동하고, 인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동 노력한다는 데 합의했다.

2월23일에는 국민당 제4차 정기 전당대회가 열렸다. 나는 만장일치로 다시 총재에 추대됐다. 취임사에서는 합의 개헌과 대통령 직선제 추진을 재천명했다. "모든 불행한 현실은 현 정권의 독재와 정치세력의 무분별한 정권욕 때문에 빚어진 결과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통령 직선제로의 합의 개헌이야말로 이 시대를 사는 절대 다수 국민의 열망이자 이 나라 민주화의 첩경입니다. 이른 시일 안에 민주화와 정치 일정에 합의하기 위한 청와대와 여야 정치지도자 회담을 정식으로 제안합니다."

그러나 국회 소집 합의는 이뤄지지 못했다. 민정당과 신민당은 그 책임을 서로 떠넘겼다. 당시 정치권 안팎에서는 개헌에 관한 중대 결단 소문까지 나돌았다. 중대 결단이란 다름 아닌 호헌으로 후퇴하는 것을 뜻했다.

답답하기도 했거니와 호헌 소문까지 나도는 마당이어서 나는 4월2일 기자간담회에서 민정당과 신민당을 함께 비판했다. "정국 주도의 책임을 진 여당이 이런 소극적 자세로 일관해서는 난국을 풀어갈 수 없습니다. 여당은 구속자를 석방하고, 사면 복권을 단행하고, 선거법 등 일련의 민주화 조치를 취해 합의 개헌의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신민당 또한 당파 싸움을 거듭함으로써 정국을 마비시킨 일단의 책임을 자성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나의 노력은 또 물거품이 됐다. 불과 사흘 뒤 신민당은 중앙당사에서 두 김씨 세력과 반대 세력간에 유혈 충돌사태를 빚었다. 당시 신민당은 이민우 구상 이후 이를 지지하는 새로운 파벌이 생긴 상태였다.

국민의 눈에 비친 신민당의 모습은 이만저만 실망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4월9일 두 김씨는 각각의 지지자를 이끌고 나와 신당을 만들 것이라고 전격 발표했다. 결국 신민당이 두 조각으로 갈라 지게 된 것이다. 이는 정부 여당에게는 호헌의 빌미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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