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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패트롤]경기 안산 원곡본동 "국경없는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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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패트롤]경기 안산 원곡본동 "국경없는 마을"

입력
2002.09.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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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인구를 포함한 외국인 노동자는 2만여 명. 한국인 초행자에게는 몇 가지 불문율이 있다. 먼저 아무에게나 길을 물으면 안 된다. 십중팔구 중국 한족이거나 몽골인인 그들의 대답은 "한국말 몰라"이다. 또 하나. 국적이 어디인지 알 필요가 없다. 피부가 검든 하얗든 대답은 '코리아'기 때문이다.▶밤에 다시 태어나는 '국경 없는 마을'

오후8시 국경 없는 마을은 때늦은 기지개를 켠다. 낮 동안 힘든 노동으로 축 처진 어깨를 늘어뜨린 외국인 노동자들이 버스, 지하철, 일용노동자용 트럭에서 내리기 시작하면 마을은 이내 중국어 러시아어 방글라데시어 등으로 떠들썩해진다.

중국어와 아랍어, 영문으로 된 상점 간판에 불이 들어오고 각 나라의 생소한 향신료 냄새로 거리가 뒤덮인다. 노래방 스피커들에서는 출처를 알 수 없는 각국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싸구려 옷을 고르는 카자흐스탄인, 새마을 금고 앞에서 동료를 기다리는 몽골인, 전통복장에 슬리퍼를 신고 산책하는 인도인, 지역 케이블 TV가 제공하는 자국 방송의 드라마에 푹 빠져 걸음을 멈춘 방글라데시인의 모습도 보인다. 거리 곳곳의 '전화 거는 집'에는 모자를 눌러쓰고 가방을 둘러멘 외국인 노동자들로 붐빈다. 이들에게는 고향에 있는 식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고 애환을 하소연하는 가장 즐거운 시간이다.

거리 양 옆으로 줄지어 있는 노상 주점에는 벌써부터 고향 친구들끼리 모여 앉아 양고기 꼬치를 안주로 술판이 벌어졌다. 방글라데시인 쇼핼(28)씨는 "밤이 되면 고향과도 같은 풍경에 친구들이 그리워 거리로 몰려나와 고단함을 달랜다"고 말했다. 오후10시 한 중국식당 안에는 술이 거나해진 한 무리의 한족들이 언성을 높인다. 중국식 탕수육과 소주 몇 병이 놓인 탁자에서 일어난 이들은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와 한바탕 소란을 부린다. 경찰이 달려오는 게 겁이 난 식당 주인이 달려와 뜯어 말린 후에야 잠잠해진다.

▶제발 단속만 없다면…

밤마다 원곡본동은 여전히 술렁이지만 얼마 전 불법체류자 단속이 강화하면서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았다. 이 달 초 안산역에서 벌어진 대대적인 단속으로 1,000여명이 잡혀갔다는 흉흉한 소문이 퍼지자 외국인 노동자들은 웬만해서는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친구들을 찾아 오던 발길도 뚝 끊겼다. 눈치 빠른 외국인 노동자들은 안산역에서 내려 지하도를 건너지 않고 역사를 빙 돌아 마을로 들어온다. 신상을 묻는 낯선 사람을 만나면 슬슬 피하기부터 한다. 인도인 지하르사(47)씨는 "한국인들이 힘들다고 하지 않는 일을 우리가 도맡아 하는데 한국인들은 우리를 쫓아내려고만 한다"며 "하루도 마음 편히 자 보지 못했다"고 하소연했다. 방글라데시인 라다(33)씨도 "아무 말썽 없이 한국인 이웃들과도 잘 지내는 우리들을 왜 잡아가는지 모르겠다"고 불평했다.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하지만 외국인 노동자들은 잡히지 않는 한 마을을 떠나지 않는다. 오히려 마을로 이사를 오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들이 숙소로 사용할 고시원 건물을 짓는 모습도 곳곳에서 눈에 띈다.

파키스탄인 하산(28)씨는 최근 원곡본동의 새로운 주민이 됐다. 월세 14만원짜리 0.5평 고시원 방이지만 그는 한국에서 처음 가져본 만원짜리 이불만 봐도 행복하다. 그는 "정보도 풍부하고 서로 의지하고 사는 마을 분위기 때문에 성공한 사람이 많다고 들었다"며 "열심히 돈을 모아 성공하는 게 꿈이지만 최소한 한국인 주민들의 신고로 경찰이 새벽에 집으로 들이 닥치는 일은 없을 것 같아 안심"이라고 말했다.

고국에 대한 향수와 한국인에 대한 분노, 돈을 벌 수 있다는 희망, 언제 쫓겨날 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 국경 없는 마을의 밤은 이렇게 깊어만 간다.

/안산=고찬유기자 jutdae@hk.co.kr

■ 내년 출국예정 후세인씨

"다시 돌아옵니다. 한국은 제2의 고향이니까요."

불법체류 자진신고를 해 내년 초 한국을 떠나야 하는 모하메드 후세인(31·사진)씨는 요즘 쉴새 없이 바쁘다. 원곡동에 처음 세워지는 이슬람 사원 건립과 야채 농장 및 방글라데시 음식점 운영, 방글라데시 노동자 복지협의회 회장 일까지. 언뜻 보면 그는 한국을 떠날 생각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떠납니다. 벌써 비행기표까지 샀는데요." 유창한 한국어로 대답하는 후세인씨의 표정은 오히려 담담하다.

후세인씨는 1991년 3개월짜리 관광비자로 입국했다. 그가 정식 체류 허가를 받은 기간은 올해 자진신고로 얻은 1년을 포함해 고작 3년. 나머지는 불법 체류자 신분이었다. "돌이켜 보면 운이 좋은 편이었어요. 고향 사람들 가운데 105명이 산재 등 사고와 비관 자살로 목숨을 잃고 수천 명이 빚도 갚지 못한 채 강제출국 당했습니다."

후세인씨 역시 동료들과 똑 같은 아픔을 당했다. 월급을 5개월이나 못 받고, 경찰에 붙잡혀 강제 출국 당할 뻔한 적도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는 "인간취급을 하지 않는 한국인들이 한없이 미웠다"고 털어놓는다.

하지만 95년 원곡동 주민이 되면서 생활이 달라졌다. 같은 처지에 놓인 외국인 노동자들과 교류하고 함께 문제를 풀어가면서 한국인에 대한 원망도 차츰 사라졌다.

그는 "원곡동은 한국인 이웃들이 잘 대해주고 삶의 터전이 있는 곳"이라며 밝게 웃었다.

/안산=고찬유기자

■ 국경없는 마을 유래

1970년대까지 경기 안산시 원곡동 일대는 끝없이 펼쳐진 갯벌이었다. 한가한 어촌 주민들은 굴을 따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던 것이 77년 갯벌을 매립하고 반월공단이 생기면서 고향을 떠나 도시로 몰려 든 공단 근로자들의 집단 주거단지가 생겼다. 88년엔 인근에 시화공단이 건설됐다.

90년대 초 3D 업종을 기피하던 한국인 노동자들이 하나 둘 마을을 떠나자 그 자리를 외국인 노동자들이 메우기 시작했다. 더욱이 97년 IMF 경제위기가 닥치면서 잇따른 업체들의 부도로 공단 기숙사에서 살 수 없게 된 외국인 노동자들이 대거 원곡동으로 몰려왔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급증하면서 임금체불과 산업재해를 호소하는 목소리가 커지자 94년 안산 외국인 노동자 센터가 문을 열었다. 이어 99년 안산 외국인노동자 센터 박천응(朴天應·42) 목사가 이 곳을 '국경 없는 마을' 이라고 이름 붙이고 올해 초 '마을 추진위원회'를 구성, 국경 없는 마을 원년으로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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