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부모들이 음식을 감출수록 더 많이 먹고 싶어지고, 따라서 체중도 줄지 않아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아이들에게 무턱대고 잔소리를 해봐야 장기적으로는 효과가 하나도 없어요."25일 오후 영동세브란스 병원에서 진행된 소아비만 집단치료 프로그램. 뚱뚱한 초등학생들이 엄마 또는 할아버지와 함께 참가했다. 프로그램 진행자는 소아과 의사가 아닌 정신과의 천근아 교수. 그는 "참 많이 빠졌어" "훌륭해" "너 다리 길어. 멋있어" 등 틈나는 대로 아이들을 칭찬하면서 비만을 물리치는 여러가지 방법을 내놓았다. 절반은 부모에 대한 주문이었다.
정신과를 통한 비만 치료가 최근 주목받고 있다. 개원한 정신과 의원이 비만 클리닉을 운영하는 경우가 최근 2,3년새 크게 늘었고, 영동세브란스 병원의 3개월짜리 프로그램은 3기에 돌입했다.
비만치료를 왜 정신과에서? 정신과 전문의들은 "요요현상등의 부작용 없는 근본적인 비만치료는 결국 잘못된 식사습관과 생활습관을 찾아내 고치는 것이고, 이 같은 행동수정 요법은 정신과의 전문영역"이라고 말하고 있다. 한창 자라는 아이들에겐 갑자기 10㎏ 이상 빼는 것보다 더 이상 찌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천 교수는 "인지행동 요법을 실시한 결과 부작용없이 평균 비만도가 10∼15% 정도 줄어드는(키가 1㎝ 자라고 체중이 2∼3㎏ 빠지는 정도) 등 효과가 좋다"고 말한다. 프로그램에 함께 참여한 한 어머니는 "이 곳에 오기 전까진 비만을 신체적 병으로만 생각했다"며 "습관이 바뀌고 체중이 줄면서 성격까지 명랑해져 아주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천근아 교수의 프로그램에는 아이들이 비만을 일으키는 생활습관을 스스로 인식하고 바로잡도록 하는 재미난 도구들이 활용된다. 먹고싶은 욕구, 즉 신체적 배고픔과 구분되는 심리적 배고픔에 대해 아이들이 싫어하는 별명, 예컨대 오사마 빈 라덴, 안톤 오노, 반에서 자기를 놀리는 친구 이름 등을 붙이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부터 괜히 먹고싶어질 때면 이 별명을 떠올리며 "지금 먹으면 내가 지는 거야"라고 생각해 보라고 유도한다.
'행동고리 작성'은 먹는 행위를 분석적으로 보고, 행동을 바꿀 계기를 발견하도록 한다. 영희가 집에 혼자 있는 토요일 오후 과자를 사서 TV를 보며 10개를 먹었고, 죄책감으로 더 먹어버렸다면 이 행동은 '과자를 산다→과자를 식탁 위에 놓는다→집에 혼자 있다→심심하고 지루하다→먹고싶다→부엌으로 간다→과자를 집는다→TV를 보면서 먹는다→배부를 때까지 빨리 먹는다→실패를 자책한다→자제력이 약해진다→좀더 먹는다'는 12개 행동고리로 작성된다. 초기일수록 연결고리를 끊기 쉽다. 아예 과자를 사지 않거나, 과자를 사서 안 보이는 곳에 두거나, 집에 혼자 있어 심심하면 밖에 나가 놀 궁리를 한다는 식이다.
심리적 배고픔을 잊기 위해 풍선불기, 피리 불기, 운동, 그림 그리기 등 다양한 행동을 제시하기도 한다. 별명붙이기, 행동고리 작성 등은 원래 정신과에서 강박증이나 알코올·담배·마약 중독, 거식증 같은 식이장애 등을 치료하며 개발된 도구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집단 치료는 6개월 정도 계속해야 하고 가족의 도움이 절대적이다. 또 부모가 치료에 함께 참여하면서 태도와 행동을 함께 바꿔야 한다.
성인에게도 이러한 치료방법이 매우 유용하다. 아름다운 미래 의원의 송현철 원장은 "소아 청소년 뿐 아니라 성인의 비만치료에서도 생활습관 수정이 가장 근본적"이라며 "약으로 단시간에 체중을 줄인 경우 약을 끊었을 때 보상심리로 더 먹고싶어지는 등 부작용이 없을 수 없다"고 말했다.
/김희원기자 hee@hk.co.kr
● 뚱뚱한 아이 만드는 환경들
초등학교 3학년짜리 아들을 둔 직장여성 P씨는 아이의 비만이 자신의 직장생활과 관련이 크다고 생각해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2년 전 직장을 쉬고 있을 때만 해도 정상이었던 아이가 자신이 직장에 나가면서부터 급격히 뚱뚱해졌기 때문이다.
전문의들은 "맞벌이 부부의 자녀가비만해지는 경우는 매우 흔하다"고 말한다. 첫째 이유는 식습관. 직장을 다니는 어머니는 대체로 음식을 냉장고 가득 쌓아놓고, 쉬는 날이면 평소 못해준 것을 보상하기 위해 외식을 즐긴다. 부모의 관리에서 벗어난 아이는 컴퓨터 게임이나 TV를 보면서 청량음료와 과자 등을 많이 먹게 된다. 또 엄마 없는 공허한 심리가 괜한 식욕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모두 비만을 일으키는 전형적인 생활습관이다.
비만한 부모의 자녀가 비만아가 될 확률도 매우 높다. 유전적 유사성도 가정해 볼 수 있지만 맞벌이 집안처럼 식습관이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다. 고칼로리 음식을 좋아하는 부모를 따라 자연히 이러한 입맛이 생기게 된다.
영동세브란스병원 천근아 교수가 최근 37명의 비만아동을 조사한 결과 정서불안을 보이는 아이일수록 '감정적 식사'를 하는 경향이 강했다. 즉 기분이 나빠서(또는 좋아서) 폭식을 하는 아이를 살펴보면 평소 감정 기복이 심하거나 손톱을 물어뜯거나 신경이 날카로운 아이인 경우가 많다는 것. 또 아동성격척도에서 위험회피 성향의 아이일수록 운동을 안 한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위험회피 성향이란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을 싫어하고 겁이 많은 성격을 말한다.
TV, 비디오 시청, 컴퓨터 게임은 소아비만과 가장 연관이 큰 행동으로 꼽힌다. TV나 컴퓨터와 지내는 시간이 늘어나는 이유는 밖에서 놀 공간이 마땅치 않고, 부모가 TV를 '베이비 시터'로 활용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습관은 운동을 제한하게 되고, 체중이 늘면 다시 움직이기 싫어하는 악순환을 일으킨다.
중고생 정도의 청소년에겐 사춘기의 예민한 심리, 학업에 대한 스트레스가 폭식으로 연결되는 등 보다 복잡한 심리적 문제가 있을 수 있다. 특히 부모가 형제끼리 노골적으로 비교하는 태도를 보이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정신과 전문의들은 "소아 비만에게 가족 특히 부모가 끼치는 영향은 절대적"이라고 말한다. 비만치료에 부모가 동참하는 것은 물론, 때로 문제가 있는 부모가 집중치료를 받을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김희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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