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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마르크스를 제대로 보자"

입력
2002.09.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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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는 죽지 않았다!" 1991년 옛 소련의 붕괴 이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듯했던 마르크스주의를 재평가하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김수행(경제학) 김세균(정치학) 서울대 교수 등 진보적 지식인 230여명은 28일 마르크스를 주제로 한 학술문화제 '맑스 코뮤날레' 정례화를 위한 조직위원회를 결성했고, 국내 최대 규모의 학회인 한국정치학회도 앞서 27일 '맑스주의의 미래'를 다각도로 짚어보는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그동안 국내 학계에서 마르크스의 대를 잇는 이론적 논의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최근의 움직임은 마르크스주의를 세계화한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적 모순을 규명하는 유효한 도구이자 실천적 대안으로 복권하려는 시도가 본격화했다는 점에서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왜 지금, 다시 마르크스인가

자본주의는 옛 소련을 축으로 한 현실 사회주의의 도전이 비극적 종말을 고한 뒤 더 이상 '외부'가 없는 전 지구적인 세계 체제를 구축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 미 조지메이슨대 교수가 그 유명한 저서 '역사의 종언'에서 "더 이상 진화가 필요 없는 이상적 정치·경제 체제"인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를 선언한 이후 지난 10년간 인류의 삶은 과연 나아졌는가. 마르크스의 후예들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자본의 횡포를 일정하게 제한하던 민주적 통제장치들이 사라지고 자본에 무제한의 자유가 안겨지면서 이른바 '20대80 사회'로 대변되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화·확대되고, 아시아와 남미의 수많은 국가 경제가 파탄에 빠졌으며, 미국 경제도 유례없는 위기에 봉착해있다. 이는 바로 마르크스가 지적한 자본주의의 근원적 모순이 전 지구적으로 확산된 결과라는 게 이들의 진단이다.

마르크스를 다시 보자는 이들의 이념적 스펙트럼은 사회주의혁명 노선을 견지하는 견해에서 마르크스 이론의 일부를 차용하거나 이를 재정립해 현실 분석의 틀로 삼는 논의까지 퍽 다양하다. 그러나 이들은 한결같이 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를 예리하게 통찰한 마르크스주의의 복원을 통해 오늘날 세계가 당면한 문제들의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진보진영 연대의 장, '맑스 코뮤날레'

마르크스 이론을 다시 진보 진영의 핵심 이론으로 삼을 것을 주장하며 28일 출범한 '맑스 코뮤날레' 조직위원회에는 학계, 문화예술계의 진보적 인사들이 총망라돼있다. 김수행 상임대표를 비롯해 김진균(서울대·사회학) 오세철(연세대·경영학) 염무웅(영남대·독문학) 교수, 김윤수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이사장, 철학자 윤구병씨, 화가 신학철씨, 민중신학자 홍근수 목사 등 10명이 공동대표를 맡았고, 강내희(중앙대·영문학) 정성진(경상대·경제학) 조희연(성공회대·사회학) 교수, 이진경 수유연구실 연구원 등 230여명이 회원으로 참여했다. 조직위측은 올해 안에 500여명, 장기적으로는 1,000여명의 회원을 확보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코뮤날레'는 코뮨(Commune)과 비엔날레(Biennale)를 합쳐 만든 말로, 2년마다 마르크스 주제의 학술문화행사를 열 계획이다. 내년 4월28∼30일로 예정된 첫 대회에서는 마르크스주의의 쟁점과 다양한 분파, 현대 자본주의와 향후 이행 전망 등을 주제로 100여편의 논문이 발표될 예정이다. 28일 발표한 '결성 취지문'에서 드러나듯 이들은 마르크스주의의 복원과 함께 진보 진영의 조직적 연대를 목표로 삼고 있다. "현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한국 진보학계는 마르크스 이론을 폐기했고 그 결과는 방향 상실과 주류 부르주아 이론에 의 학문적 종속일뿐이었다. …맑스 코뮤날레는 한국 진보학계가 독자성을 회복하게 함은 물론, 실천가들과 연대할 수 있는 길을 제공해 전체 진보진영의 역량 강화에 기여할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쟁점

27일 외교안보연구원에서 열린 '맑스주의의 미래' 학술대회는 보수적 색채가 강했던 한국정치학회에서 마르크스주의 공론화의 장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이 자리에는 피터 고완(영국 노스런던대) 질베르 아슈카르(프랑스 파리8대학) 프랑크 데페(독일 마르부르크대) 등 유럽 좌파학계를 대표하는 이들이 참석,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점과 향후 발전 전망에 관한 연구 성과를 발표했다. 고완 교수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분석하면서 "90년대를 풍미한 '신 자유주의'의 승리가 종말을 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아슈카르 교수는 "지난해 9·11 테러는 '문명의 충돌'이 아닌, 문명의 더러운 배설물인 '야만들의 충돌'"이라면서 테러를 빌미로 한 미국의 헤게모니 확장욕을 정면 비판했다.

정성진 경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는 '21세기 미국 제국주의 분석'이란 주제발표에서 "독점과 제국주의를 레닌과 달리 경쟁의 제한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격화한 경쟁으로 파악한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비판' 체계는 오늘날 세계화 국면의 제국주의를 이해하는데 여전히 유효하다"고 주장했다. 서관모 충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마르크스주의 계급론 분석을 통해 "알튀세르의 말대로 마르크스주의가 '계급투쟁의 조건과 형태, 효과들에 관한 이론'이라 할 때 경제적 양극화가 미증유의 속도로 진행되는 오늘날 마르크스주의의 중요성은 어느 때보다 커지고 있다"고 밝혔다. 이진경 연구원은 부르주아계급 형성과정에서 국가가 절대적 역할을 했다고 밝히면서 "현실 사회주의가 실패한 것도 자본주의적 국가체제가 그대로 유지됐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희정기자 jaylee@hk.co.kr

● "맑스 코뮤날레" 상임대표 김수행 교수

"다시가 아니라, 이제 제대로 마르크스주의를 보자는 것이죠. 1980년대 국내 학계와 운동권이 관심을 가졌던 것은 진정한 마르크스주의라 할 수 없습니다."

28일 '맑스 코뮤날레' 조직위원회 출범식에서 상임대표로 선출된 김수행(金秀行·60)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왜 지금 다시 마르크스주의인가"라는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그는 "서구의 좌파들은 옛 소련의 존재를 자국 자본주의 체제비판을 위한 하나의 도구 정도로 여긴 반면, 국내 진보진영은 소련 북한 등에 의해 왜곡된 현실 사회주의를 좇았기에 소련 붕괴 이후 큰 충격에 휩싸인 것"이라면서 "더욱이 이들은 지난 시절에 대한 엄격한 자아비판은커녕 포스트 마르크시즘 등으로 은근슬쩍 방향 선회를 해버렸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마르크스 이론의 핵심으로 계급모순을 꼽는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계급투쟁을 간과하고는 자본주의의 전개 과정과 현실 사회의 문제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계급간 이해 대립을 인정하고 이를 어떻게 조정할 것인지를 모색하는 것이 중요하다."

김 교수는 분석가로서의 마르크스는 물론 '예언가'로서의 마르크스도 전적으로 신뢰하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자임을 자처한다. 그는 "후쿠야마 등의 공언처럼 자본주의는 절대 역사의 마지막 단계가 아니다"면서 "다만 나는 자본주의 이후를 사회주의로 특정하기보다 자유와 평등, 그리고 진정한 연대가 실현되는 '새로운 사회'라고 부르고 싶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맑스 코뮤날레'를 열린 토론의 장으로 이끌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학문에서 합의란 있을 수 없다. 나와 다른 견해라도 과학적 기반을 갖췄다면 그 자체로 인정하고 이를 토대로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실천 대안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서울대 경제학과와 동 대학원을 나온 김 교수는 68년 통혁당 사건에 휘말려 방황하다 외환은행에 취직했다. 런던지사 근무 시절 '자본론' 등을 접한 그는 75년부터 다시 학업을 이어 런던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내 '정치경제학 박사 1호'로 한신대를 거쳐 89년 서울대에 자리를 잡았으며 88∼92년 '자본론' 세 권을 완역, 출간했다. 그는 "섣부른 실천보다 먼저 기초적인 이론 연구에 매진하는 풍토가 아쉽다"면서 "특히 요즘 대학생들이 취직 준비 등에 매달려 정작 해야 할 공부를 등한시 해 걱정"이라고 말했다.

/이희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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