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세미나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은 처음본다." 28일 오후 2시 이화여대 법정관 강당. 서울시립미술관 주관으로 26일 개막한 제2회 국제 미디어아트 비엔날레 '미디어―시티 서울 2002'의 학술 심포지엄이 열리는 자리였다. 750석 규모의 강당을 꽉 채우고 남은 청중을 보고 토론자로 나선 김정탁 성균관대 언론정보대학원장은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그 많은 청중은 이 심포지엄 참석차 처음 방한한 프랑스의 석학 장 보드리야르(73) 때문이었다. 미술은 물론 인문·사회과학 전공 학생과 교수, 미술관과 화랑의 큐레이터, 화가들이 그의 주제발표를 듣기 위해 몰려든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이미지의 폭력 ? 이미지에 가해진 폭력, 이미지 왜곡'이란 발제문을 읽어내려갔다. 그의 '시뮬라시옹' 이론으로, 현대 미디어 테크놀로지가 어떻게 인간·사회의 현실과 실재를 왜곡하는가 논증한 것이었다.
"영화 '라스베이거스를 떠나며'에서 금발의 젊은 여인이 끊임없이 중얼거리면서, 태연하게 오줌을 누는 것을 볼 수 있다. 자신이 하는 말과 행동에 그녀는 무심하다. 완벽하게 소용없는 장면. 그러나 이 장면이 노골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그 어떤 것도 리얼리티와 픽션의 오버랩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과 모든 것이 볼거리를 준다는 것, 볼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 즐길 준비가 되어있는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미디어로 인한) 투명성이다. 모든 현실세계를 가시성의 궤도 안에 놓는다는 것 말이다. 용도 없이, 필연성 없이, 욕망 없이, 효과 없이 보여지는 것이 외설이다." 이미지의 폭력으로 더 이상 숨길 것이 없어진 세계의 '외설성'이 우리의 도덕성의 사인(sign)이 되었다고 그는 말했다.
난해한 발제문이었지만, 보드리야르는 가끔 이런 예를 들어가며 현실에서 만들어진 이미지가 거꾸로 현실을 지배하고 극단적으로는 하이퍼리얼리티(초현실)가 되어버리는 현상을 현란하고도 철학적인 표현으로 보여주며 청중을 사로잡았다.
심포지엄 후의 토론과 인터뷰도 보드리야르에게 집중됐다. "이미지가 현실을 왜곡하는 실례를 들어줬으면 한다"는 질문에 나온 그의 재치있는 답변은 듣는 이의 웃음을 자아냈다. "어제 민속촌을 방문했을 때 한국의 전통 혼례식이 열리는 걸 봤다. 나는 그것이 진짜 결혼식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디즈니랜드와 같은 가상적인 것이었다. 상황분석가인 나도 그런 함정에 빠지고 만 것이다."
많은 학자나 문명비평가들이 보드리야르의 주장과 이론에 대해 "미디어기술의 발전에 따른 피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닌가"라며 대안 없음을 비판하기도 한다. 보드리야르는 이 비판에 대해 "이미지의 특성이 살아남을 수 있는 독특함, 그것을 간직한 순수한 이미지가 내가 생각하는 형이상학적인 문제이다"라고 답했다. "이미지의 폭력은, 바로 그 폭력이 실재를 사라지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모든 실재가 이미지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 실재가 사라지는 대가를 치른다. 이것이 이미지의 매력이기도 하다. 극단적인 경우에 현실세계는 그 기능을 잃고, 유령의 형태와 사건의 총체가 된다. 물론 (미디어가 없는) 과거로 거슬러 갈 수는 없다. 사라지는 본질을 있는 그대로 포착하고 살릴 수 있는지 생각하는 것이 문제다."
보드리야르는 문제를 자연스럽게 '세계화' 논란과 연결시켰다. "세계화에 저항하는 것이 나의 입장이다. 그것은 사라져가는 여러 문화의 고유성을 지키는 것이다. '세계성'이란 그 자체가 가상적인 것이다. 기술의 전횡으로 모든 이미지가 세계화했지만 몇몇 이미지들은 거기 대항할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 '미디어화하지 않은 언어'가 그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세계화, 정보화를 하나의 게임으로 본다면 사실 그 게임의 상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면서 "세계화로 사라진 것을 되찾는, 더 큰 게임밖에 시스템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없다"고 덧붙였다.
미술 행사인 '미디어―시티 서울 2002' 같은, 예술 행위는 이미지 폭력의 시대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보드리야르는 "예술에서도 독자성, 독특함이 중요하다"고 전제했다.
"예술가들이 세상이 미디어화하는데 음모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예술이 유행을 따라가면 미디어의 반복 밖에 더 되는가. 이미지의 증식과 구별되는 어떤 성스러운 이미지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보드리야르는 노타이 재킷 차림으로 담배를 피우면서 여유있는 모습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인간은 자기 존재의 여행자" "가시성(可視性)은 실존의 가장 파괴된 형태" 등등 종횡으로 구사되는 그의 말은 한 판 사유와 언어의 잔치 같았다.
/하종오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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