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9월28일 필리핀의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가 망명지인 하와이에서 72세로 사망했다. '피플파워'라고 불렸던 민중 봉기로 대통령 자리에서 쫓겨난 지 세 해 만이었다. 마르코스는 이승만과 박정희를 합쳐놓은 것 같은 인물이었다. 항일 운동 경력을 정치적 자산으로 삼아 대통령이 된 민간인으로서, 선거 부정이 촉발한 민중 봉기로 하야해 하와이에서 죽었다는 점에서 그는 이승만을 닮았다. 그러나 독재 체제의 강화 과정과 정적 탄압 방식에서 그는 박정희를 더 닮았다.박정희와 동갑나기인 마르코스의 통치 행태는 약간의 시차를 두며 박정희를 그대로 모방하는 듯 했다. 1963년에 대통령이 된 박정희가 재선 임기 중인 1969년에 삼선 개헌을 통해 장기집권의 발판을 마련한 뒤 1972년의 유신헌법으로 실질적인 종신 대통령이 되었듯, 1965년에 집권한 마르코스도 삼선을 금지하는 헌법을 재선 임기 중인 1972년에 폐지하고 이듬해 대통령에게 삼권을 집중시키는 새 헌법을 공포하며 영구 집권의 길로 들어섰다. 유신헌법 개정 100만인 서명 청원운동, 민주회복 국민회의 결성 등 반유신(反維新) 민주화 운동을 박정희가 억압적 분위기 속의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를 통해 봉쇄했듯, 마르코스도 자신의 계엄령 체제를 거의 해마다 국민투표라는 껍데기 신임 절차를 통해 정당화했다. 박정희 체제 아래서처럼 마르코스 체제 아래서도 군부에 힘이 쏠리고, 국민 통제와 동원이 일상화하고, 경제 개발이 국가의 표어가 되었다.
어느 점에서 마르코스는 박정희보다 더 나아갔다. 김대중을 납치하고 가두면서도 살해하지는 못했던 박정희와 달리, 마르코스는 정적 베니그노 아키노를 백주 마닐라 공항에서 살해했다. 그 정적의 아내 코라손 아키노는 세 해 뒤 대통령궁의 새 주인이 되었다.
고종석/편집위원 aromach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