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가 문명충돌에 대한 논쟁으로 들끓고 있다. 1990년대초 헌팅턴의 글로 촉발된 이 논쟁은 9·11 테러로 더욱 가열되었다. 이슬람 문명이 과연 테러를 조장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슬람의 근본정신을 저버린 자들이 이슬람의 이름으로 테러를 자행하는 것인지에 대한 무수한 논의가 전개되고 있다. 그리고 이제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공격이 임박한 가운데 문명충돌론은 다시 한번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이러한 현실을 반영하듯, 유엔은 올해를 '문명간 대화의 해'로 지정했고 엊그제 폐막된 ASEM정상회의 역시 '문화와 문명간의 대화'(A Dialogue of Cultures and Civilizations)가 주제였다. 공교롭게도 현재 벌어지고 있는 문명충돌의 당사자인 미국과 중동 국가들을 제외한 아시아와 유럽 정상들의 회의였지만 여기에서도 화두는 단연 문명충돌이었다.
세계의 문명지도를 놓고 볼 때 우리가 속해 있는 유교문명권은 서구의 근대문명과 특이한 관계를 맺어 왔다. 유교권도 한때 이슬람, 힌두, 불교 문명권 못지않게 서구문명에 대해 격렬히 저항한 때가 있었다. 일본은 페리 제독의 함대 앞에 굴복할 때까지 철저한 쇄국정책을 고수하였고, 조선은 대원군 하에서 '위정척사' 기치를 내걸고 미국, 프랑스 등 서구열강과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중국 역시 청조의 마지막까지 의화단 사건과 같은 서구문명 배척운동이 도처에서 일어났다. 이 모두 동아시아와 유교문명이 세계에서 가장 앞선 문명이라는 자부심에서 비롯된 저항이었다.
그러나 일본이 명치유신을 단행하고 중국이 5·4 운동과 신해혁명을 거치면서 서구와 근대문명에 대한 저항은 사라졌다. 조선도 국권을 상실하고 일제치하에서 근대화의 과정을 밟기 시작하지만 그 누구도 무너진 조선왕조를 복원하거나 유교를 근간으로 하는 문명의 유지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이후 유교권 국가들은 앞만 보면서 근대화의 길을 달려왔고 지금도 달리고 있다.
이슬람, 힌두, 불교 문명권의 수많은 나라들이 서구의 근대문명에 대해서는 아직도 근본적으로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하고 있는 반면 유교권 국가들은 그렇지 않다. 많은 점에서 우리는 서구의 근대문명을 서구보다 더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잘 살게 됐다. 기독교 문명권을 제외하고는 한국과 일본, 대만, 홍콩, 싱가포르, 그리고 최근에는 중국까지 포함하는 유교문명권만이 산업화와 근대화에 성공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성공에는 대가가 따르게 마련이다. 우리는 산업화와 근대화에 있어서 성공했지만 반면 자신의 문화와 문명에 대한 자신감과 재평가에 있어서는 그 어떤 문명권보다 뒤떨어져 있다. 그리고 서구화나 근대화에 대해서 동아시아의 국가들만큼이나 무비판적인 문명권을 찾아보기가 힘들게 됐다. 많은 나라들이 자국의 문화와 문명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급격한 세계화와 미국문화의 홍수를 우려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저 태연하기만 하다.
ASEM이 보여주듯 이제 세계의 담론은 문화와 문명에 대한 논의가 그 중심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문명간 대화에 어떻게 참여하고 무슨 기여를 할 수 있을까? 서로 충돌도 하지만 동시에 다양성을 제공하면서 새로운 보편문화의 건설을 예견하고 있는 '전 지구적 대화'에 우리는 언제까지 열외로 남아 있을 것인가? 자신의 문화와 문명에 대해 강렬한 색깔을 보이는 이슬람, 힌두교, 불교 문명권 국가들에게 우리의 문화와 문명의 색깔을 보여줄 수 있을까?
이러한 '세계의 담론'에 우리도 이제는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문명권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의 문화와 문명권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혼란과 폭력 속에서 시작된 문명간의 대화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보편문명의 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함재봉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