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민중미술 목판화의 칼 맛과 손 맛을 다시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거칠지만 작가의 손길이 살아 숨쉬는 듯한 그 느낌을요."총4부 중 최근 제1부가 출간된 만화 '꽃'(새만화책 발행)은 과거 민중판화 모음집을 보는 것 같다. 411페이지 전부가 목판화 같은 그림으로 채워졌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나무를 깎아 찍은 진짜 목판화가 아니라, 펜에 검은 잉크를 묻혀 그린 일종의 펜화이다.
작가 박건웅(30)씨는 이를 "대학(홍익대 회화과) 재학 중 선배들로부터 배웠던, 어둠에서 밝음을 깎아내는 목판작업에 대한 향수이자 복원작업"이라고 말했다.
작품은 죽음을 앞둔 비전향 장기수 쟁초가 회상하는 그의 일생이 줄거리. 1930, 40년대 일제 치하에서 징용으로 끌려갔고, 광복 이후에는 독립투사의 암살범이란 누명을 쓰고 옥고를 치렀으며, 한국전쟁 때는 본의 아니게 지리산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한 파란만장한 한 인간의 삶이 대서사시처럼 펼쳐진다. 어린시절 동네 지주의 딸 달래와의 가슴 아픈 사랑도 곁들였다.
2000년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제작지원 공모 당선작인 '꽃'에는 대사가 단 한마디도 없다. 모든 것을 그림으로 말했다. 비전향 장기수의 굴곡진 삶, 지리산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빨치산들의 일상을 어떻게 대사 한마디 없이 그릴 수 있었을까. 4부까지 합치면 1,150페이지에 달하는 엄청난 분량인데…. "독자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말보다는 그림에 집중해 달라고요. 새 한 마리가 그려진 한 컷의 의미, 흑백에서 갑자기 칼라로 장면이 바뀐 이유 등을 신경 써서 본다면 수 백마디 대사나 지문보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겁니다."
"그림에 최대한 신경을 썼다"는 말은 결국 엄청난 작업량을 뜻한다. 그림작업만 꼬박 4년(1998∼2001)이 걸렸다. 하루에 평균 7시간 작업을 해야 고작 1페이지가 나온다. 연필로 스케치를 하고, 색연필로 바탕색을 칠하고, 포스터물감으로 채색을 한 뒤 펜으로 목판 분위기를 내는 작업의 연속이었다. 창작만화·애니메이션 제작지원 공모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만화가 김형배씨는 "제출된 포트폴리오(작품 견본)를 보는 순간 지문과 대사를 배제한 채 장편을 이끌어가려는 그의 고집스러움에 주눅들 수밖에 없었다"고 회상했다.
제주 4·3항쟁을 다룬 만화 '섬'을 기획 중이라는 작가는 "흔히 '빨갱이'로 폄하해 온 비전향 장기수를 거친 역사의 풍랑에 휘말린 '착한 할아버지'로 묘사하려고 애를 썼다"고 말했다. "그동안 쓴 펜촉만 400여 개에 달합니다. 후반부에서는 미술과 만화의 다양한 표현방법을 보여준다는 계획으로 연필화와 수채화까지 집어넣었습니다. 만화 보는 맛을 조금이라도 넓혔다고 자부합니다".
/김관명기자 kimkwm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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