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억원 투자해서 5억원?"8월 개봉한 '아유레디?'의 제작사가 극장으로부터 받은 입장료 수입이 3억원이 조금 넘는다더라. '성냥팔이 소녀의재림'은 이보다 더 비참할 것이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감독 장선우·제작 튜브픽쳐스)이 개봉하기 전 충무로에서는 "얼마나 손해 볼 것인가"가 이야깃거리였다. 아니나 다를까. 13일 개봉해 추석 연휴를 포함해 25일까지 이 영화의 관객은 14만명. 벌써 대부분 극장에서 간판을 내려 잘해야 15만명으로 끝날 것 같다. 비디오 판권, 해외 수출 등의 '여력'은 있지만 극장수입 은 5억원을 넘기기 힘들다. 현재까지는 110억원을 투자해 5억원만 건졌다.
세상에 이런 장사는 없다. 그래서 충무로에서는 '성소재림'을 '성소 재앙'이라 부른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제작사의 자금난이 부풀려져 "9월 30일 대재앙설'이 흘러나오고 있으며, 이미 "주요 간부가 다른 길을 모색하고 있다" "누구는 낮에는 돈 구하러 다니고, 술로 밤을 샌다"는소문이 무성하다. 이 재앙은 누구의 잘못인가.
▶"모든 것은 머리 속에만" 주먹구구식 제작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은한국영화 사상 유례가 없다. 제작기간 3년, "주인공 TTL 소녀가 영화 찍는 사이 늙어 버렸다"는 농담이 나올 정도로 시간이 걸렸다. 그러다 보니 순제작비 91억원 중 상당 부분이 스태프가 먹고 자는 데 들어갔다. "110억짜리 영화가 시시하다"는 관객의 비난이 합당한 것은 엄청난 제작비가 영화 콘텐츠에 투자된 것이 아니라 감독과제작사의 불화, 감독의 잠적, 스태프의 이합집산등에 따른 제작지연과 반복되는 소품과 세트장 교체 등에 너무 많은 돈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할리우드에 진출한 대만 리안 감독이나 홍콩 우위선 감독에게 할리우드 제작방식의 차이점을 물으면 한결같은 대답이 "홍콩에서는 일단 찍으면서 회의를 하는데, 할리우드에서는 회의만 6개월씩 한다"는 얘기다. 우리나라도 홍콩과 비슷하다. '성냥팔이…'의경우 영화 속 무기인 '고등어' 하나를 만드는 데 수 십 번의 시행착오를 거쳤을 정도로 영화에 대한 계획은 전무했다.
이 영화가 손익분기점인 300만명 이상의 관객을 끌어들였다 해도, 감독에게 끌려 다니는 제작사의 태도는 분명한 문제점으로 지적될 만하다. 촬영 횟수와 시간대별 동선이 명확하게 사전 조율되는 것은 우리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 제작 일정에 관한 기본 윤곽조차 잡지 못한 채 감독에게 끌려 다닌 것은 분명 예술가인 감독보다는 자금을 감독, 집행하는 제작사의 무능함이 더 많이 비난 받아 마땅하다. 흥행에 실패한 대작 영화들의 한결 같은 공통점 세가지. 주요 스태프들이 자주 바뀌고, 제작비가 엄청나게 불어나며, 제작일수가 엿가락처럼 늘어진다.
▶"큰 영화면 된다"는 투자, 배급사
'성소'와 더불어 올 영화의 3대 재앙으로 불리는 '예스터데이'(제작비 48억원, 관객 35만명) '아유레디?'(60억원, 8만명) 모두가 CJ엔터테인먼트의 투자(부분 투자 포함) 혹은 배급한 영화. '2009 로스트 메모리즈'로 시작한 CJ엔터테인먼트는 올해 블록버스터와 인연이 좋지 않다. "시네마서비스와 경쟁하는 CJ엔터테인먼트가 극장에 대한 배급력을 강화하려고 무조건 대작을 선호하다 보니, 영화의 질을 조절하지 못하고 제작사와 감독에게 휘둘리는 상황이 됐다"는 게 한 영화관계자의분석이다. 단기간에 몸집을 키우려다 보니 '아유레디?'의 경우처럼 투자사(KTB네트워크)가 부실한 영화의 '헛돈'을 대주는 꼴이 됐다.
▶떨고 있는 충무로, 어디로 가야 하나
충무로에서는 요즘 30억원짜리 이상의 영화는 투자가 수월치 않은 분위기다. 블록버스터의 잇단 실패로 투자자들이 몸을 사리고 있다. "최초 제작비에서 한 푼이라도 추가되면 내 개런티에서 삭감키로 계약을 맺었다." 할리우드에서 최고의 몸값을 받는 흥행 감독이자 제작자인 마이클 베이는 '진주만'을 제작하며 투자사와 이런 계약 맺었었다고 실토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할리우드식 관행은 요원하더라도 대작 영화의 시스템을 정비할 전문 프로듀서의 양성은 시급한 과제이다.
더불어 CJ엔터테인먼트와 시네마서비스와 같은 대형 투자자들이 영화 펀딩 단계부터 리스크를 줄이려는 노력이 필수적. 싸이더스의 노종윤 이사는 " 장선우 감독은 유럽에서 인지도가 높으므로 그쪽에서 미리 펀딩을 받는 식으로 리스크 헤징(위험 회피)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메이저 투자사가 소형 펀드를 끌어 들여 위험을 분산할 것이 아니라, 자본조달방식을 선진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기획력 있는 영화사들은 '독식하겠다'는 생각 대신 프로젝트별로 엔젤 펀드를 조성하는 방식을 통해 자금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한건주의' '한탕주의'가 만연했던 한국 영화계는 이제 체질 개선이라는 어려운 숙제를 떠안게 됐다. 그것도 '블록버스터의 재앙'이라는 비싼 수업료를 치른 후에야.
/박은주기자 jupe@hk.co.kr
● 한국영화 나아갈 방향은
이른바 '한국형 블록버스터'들이잇달아 참패하면서 CJ엔터테인먼트와 더불어 최대 투자 배급사인 시네마서비스 역시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CJ엔터테인먼트식의 블록버스터 투자가 해답이 아니라면 시네마서비스의 영화제작 방식이 대안이 되어야 할 텐데 그러기는 뭔가 마뜩찮기 때문이다.
시네마서비스는 충무로의 메이저 투자사이면서도, 한국영화 인프라 구축에는 소홀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올해 시네마서비스의 투자, 배급 영화 중 '취화선' '생활의 발견'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코믹이나 조폭의 장르영화이다. '재밌는 영화' '라이터를켜라' '가문의 영광' 등 대부분 20억∼40억원 규모로 '장르의 재생산'이라는 비난도 적잖게 받고 있다.
이같은 전략 덕분에 시네마서비스는 한국영화 투자에 관한한 CJ엔터테인먼트에 비해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시네마서비스가 고만고만한 영화들로 시장을 장악할 경우 홍콩영화처럼 장르 반복에 의한시장축소현상이 우려된다"는 비판론이 제기되는 것도 이런 이유다. 물론 옹호론도 적잖다. 영화평론가 김시무씨는 "장르화는소재의 다양성을 해치기는 하지만 효용이 매우 높은 방식이다. 단기간에 부실하지 않은 장르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노하우는 시네마서비스의 능력"이라고 설명했다.
블록버스터 영화가 한국영화의 인프라에 기여한 부분도 인정해야 한다는 동정론도 일고 있다. 튜브픽쳐스 관계자는 "비록 실패하기는 했지만 프로듀서 역할과 감독의 역할 분리, 컴퓨터그래픽, 대작 영화에 대한 마케팅 방안, 해외 세일즈를 위한 전략 등의 논의가 어느 정도는 진행됐다고 본다"고 밝혔다.
아직까지는 블록버스터에 집중 투자하는 CJ엔터테인먼트의 방식과 장르영화에 치중하는 시네마 서비스 방식 중 어느 것이 우월하다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블록버스터는 예산이 아니라 흥행의 결과를 일컫는 단어가 되어야 한다"는김동주 코리아픽쳐스 대표의 말을 되새길만한 시점이다.
■영화관련주 전망/"실패해도 책임안지는 영화시장 풍토 바뀔것"
"우리나라의 영화제작사는 돈을 쉽게 끌어다 영화를 만들고, 실패를 해도 책임을 지지 않는, 한마디로 리스크 없이 영업을 하는 구조다. 그러나 블록버스터가 잇따라 실패하면서 이런 구조에 상당한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증권 애널리스트가 보는 한국영화 제작, 투자의 문제점은 무엇일까. 대우증권 노미원 연구원(엔터테인먼트 관련주 전문·사진)은 앞으로 한국영화계에는 자금이 한 쪽으로 몰리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더욱 심화할 것으로 전망했다.
현재 한국영화 시장 자금은 단기에 수익을 내야 하는 금융자본이 너무 많이 들어와 잇따라 실패하면서 매우 위축된 상황. 노 연구원은 금융자본의 속성상 블록버스터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고, 이에 맞추다 보니 시장에서 실패하는 대형 영화들이 양산된다고 본다. "영화 펀드들은 대부분 최장 5년의 장기 자금이며, 수익률을 내지 못하는 일부 단기 투자자금들은 부분적으로 철수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영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의 배급사인 CJ엔터테인먼트의 주가 동향과 관련, "시장은 예상하지 못한 일로 크게 충격 받는다. '성소'의 흥행 부진은 '예견된 악재'였기 때문에 이미 주가에 반영돼 급격한 하락세는 없다"는 분석. 노 연구원은 올 상반기부터 시작된 대작 영화의 실패로 제작사의 파워가 줄어드는 대신, 투자 배급사인 CJ 엔터테인먼트와 플레너스(시네마서비스)의 영향력은 더욱 강해질 것으로 전망했다.
"현재는 시장이 일단 조정기를 맞는 쿨 다운 상태지만, 이 상황이 지나고 나면 안정적인 제작―배급 라인을 갖고 있는 두 기업의 시장 장악력은 더욱 두드러질 것"이라고 말했다. 두 영화사 모두 현재까지는 올해 장사에서 예상에 못 미치는 수익을 내고 있는 실정. 그러나 올 연말까지 고비를 넘기면 한국영화의 성장 잠재력은 여전히 유효하고, 따라서 영화 관련 우량주 역시 상당한 잠재력이 있다는 게 노 연구원의 분석이다.
/박은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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