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는 혁명가였던 소설가 김학철(金學鐵) 선생의 1주기 추모행사가 열렸다. 조선의용대의 마지막 분대장이었던 그는 총상으로 왼쪽 다리를 잘랐고 문화혁명때는 10년간 옥살이를 했던 사람이다. 그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폭력에 의해 희생당한 개인과 우리 시대의 폭력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어서다.10년 전 옌지(延吉)의 집으로 찾아갔을 때 소설가 김학철씨가 사는 곳이니 조용히 하라는 시당국의 거리팻말도 인상적이었지만, 그의 얼굴이 너무도 평온하고 온유한 것이 놀라웠다. 그 뒤 서울에 와 낙원동의 허름한 여관에 묵고 있을 때도 그 표정과 꼿꼿한 기개는 그대로였다. "편안하게 살려면 불의를 외면하고 인간답게 살려면 불의에 도전하라"고 그는 유서에 썼지만, 불의와 폭력에 맞서 싸우면서도 자신은 폭력적이지 않게 되기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1980년대 진보진영의 폭력성을 비판한 '당대비평' 편집위원 문부식씨의 주장을 둘러싸고 논쟁이 한창 벌어지고 있다. 문씨는 잘 알다시피 20년 전에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을 주도했었다. 그런 사람이 저서를 통해 민주화운동과정의 폭력에 대해 자기 성찰을 하면서 경찰관 7명이 순직한 부산 동의대사태를 민주화운동으로 지정한 것을 비판했으니 논란이 일 수밖에 없다. 문씨의 주장을 화두 삼아 한국산업사회학회는 27, 28일 연세대에서 '우리 안의 파시즘'을 주제로 집담회를 열고 국가폭력과 저항폭력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문씨를 비판하는 사람은 "어떤 행위도 폭력적이면 안된다"는 식의 주장은 공허한 도덕적 근본주의이며, 폭력을 동반한 어떤 운동도 민주화운동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역설적으로 폭력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 문제는 민주개혁이나 과거청산의 결과로 파생된 새로운 과제이므로 지금처럼 철저하지 못한 민주개혁이나 과거청산과정 자체의 과잉을 지적하는 근거가 돼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반면, 문씨에 동조하는 사람은 동의대사태를 희생자의 시각에서 볼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과거 진보진영의 폭력성을 문제삼는 것 자체가 시기적으로 적절치 않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 우리는 합법성과 정당성을 갖추었다는 명목 아래 자행된 국가폭력에 억압당하고 희생당해 왔다. 민주화운동은 국가폭력에 맞서 싸우는 저항폭력의 형태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 투쟁이 계속되면서 폭력은 심화학습되고, 폭력을 폭력으로 이긴 경험은 이제 각 부문에서 다양한 형태로 발현되거나 국민 각자에 내재하기에 이르렀다. 반드시 폭력투쟁의 영향 때문만은 아니지만 정치판을 비롯한 일상의 언사나 각종 토론, 경쟁의 방식에 이르기까지 폭력성이 넘친다. 대통령이 된 사람을 비롯한 많은 민주화운동가들의 사고와 행동이 실제로는 얼마나 비민주적이고 폭력적이며 권위주의에 맞서 싸운 운동권조직 자체가 어떻게 권위주의적이었던가를 생각해 볼 일이다.
폭력투쟁의 유산은 공격성 배타성 획일성을 유발하고 있다. 새롭고 일상적인 파시즘이다. 6월 월드컵때의 그 놀랍고도 일사불란했던 열기에서도 끔찍한 폭력과 파시즘의 그림자를 읽는 사람들이 있다. 더욱이 수많은 영상·출판물이 '폭력의 미학'을 확대 재생산해내고 있다. 이 정권을 조폭정권이라고 비난한 사람도 있지만, 조폭문화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부정한 국가폭력에 맞서는 방식은 마르크스주의에서 드러나는 폭력혁명론과 간디식의 비폭력주의로 대별되는데, 한국인들에게 간디식 투쟁은 큰 효용이 없었다. 민주화운동기의 저항폭력에는 나름대로 역사적 필연성이 있었다. 그럼에도 한국의 학생운동이 일본의 적군파식 투쟁으로 변질 또는 발전하지 않은 것은 큰 다행이다. 동의대사태를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한 것은 분명 잘못이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저항폭력은 성찰과 분석의 대상이지 비난의 대상까지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우리 안의 폭력의 정체를 깊이 들여다 보면서 그 부(負)의 유산을 버리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사회 각 부문에서 폭력성을 떨쳐 내야 한다.
임철순 논설위원 yc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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