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민당의 장외 개헌 투쟁이 계속되면서 여야 대치는 좀체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1986년 10월10일 국회 본회의에서는 3당 대표연설이 있었다.민정당 노태우(盧泰愚) 대표는 김영삼(金泳三) 김대중(金大中) 두 김씨를 비난했다. "우리 당은 내각제 개헌을 관철할 것입니다. 실세 대화를 구실 삼아 국회 밖으로 나가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반면 신민당 이민우(李敏雨) 총재는 새로운 제안을 했다. "현 단계에서 민주화의 핵심은 대통령 직선제의 실현입니다. 그러나 여당이 고집한다면 대통령 직선제와 내각책임제 중 하나를 국민이 직접 선택하게 할 것을 제안합니다." 개헌안을 놓고 국민투표를 하자는 얘기였다.
나는 파국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여야 대타협을 촉구했다. "국민 절대 다수는 대통령을 내 손으로 뽑겠다는 강력한 희망과 의지를 갖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헌법특위가 절차상의 문제로 중단된 것은 국민의 기대에 어긋납니다. 여야 정치지도자는 사심과 당리당략을 버려야 합니다. 나라에 파국이 오고 난 뒤 누가 대통령이 된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대표연설은 대표연설로 끝났다. 여야의 힘겨루기는 계속됐고 여당은 국민의 직선제 개헌 열기가 누그러지지 않아 초조함을 느낀 탓인지 무리수를 연발했다.
10월14일 유성환(兪成煥) 의원의 '국시 발언 파동'이 있었다. "이 나라의 국시(國是)는 반공이 아니라 통일이어야 한다"는 발언이 나오자 민정당은 체포동의안을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이어 10월28일 건국대에서 열린 전국 22개 대학 연합시위를 헬기와 8,000여명의 경찰을 동원, 강경 진압한 '건국대 사태'가 터졌다. 정부는 무려 1,525명의 대학생을 연행했고 이 중 1,295명을 구속했다.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정권의 폭거였다.
정국이 이처럼 긴박하게 돌아가는 가운데 김대중씨가 11월5일 폭탄선언을 했다. "만일 현 정권이 직선제 개헌을 수락한다면 나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 이른바 '불출마 선언'이다. 당시 유럽 순방차 독일에 가 있던 김영삼씨도 이에 화답했다. "김대중씨의 사면 복권이 이뤄지면 그를 대통령 후보로 지지하겠다고 수차 밝힌 바 있으며 그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따라서 김대중씨가 직선제 개헌을 조건으로 대통령 불출마 선언을 했지만 나중에 직선제 개헌이 되면 나는 그가 출마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울 생각이다."
두 김씨의 발언은 국민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국민들은 더욱 야당 쪽으로 끌려 왔다. 그러나 두 사람은 1987년 정작 직선제 개헌이 이뤄지자 국민과의 약속을 깨끗이 저버렸다.
두 사람의 선언에도 불구하고 여야의 대치는 끝없이 이어졌다. 민정당이 단독으로 내각제 개헌안을 발의해 통과시키려 한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신민당도 11월13일 '선전포고'를 했다. "직선제 추진 서울대회를 11월29일 열겠다." 일대 격돌이 불가피해 졌으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었다.
신민당의 서울집회 예고로 정국이 어수선한 가운데 느닷없이 김일성(金日成) 사망설이 터져 나왔다. 이는 며칠 뒤 사실무근으로 드러났고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만 더욱 커졌다. 그 무렵 정부는 북한이 금강산댐을 건설하고 있다고 발표, 국민의 불안을 더욱 크게 했다.
11월25일 3당 대표는 노신영(盧信永) 국무총리와 국회의장실에서 만났다. 노 총리는 이민우 총재에게 서울대회 중지를 요청했다. 그러나 이 총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1월29일 열릴 예정이던 서울대회는 경찰의 원천봉쇄로 무산됐다. 전경들이 방패를 들고 거리를 가득 메운 그날의 을씨년스럽던 서울 풍경은 외신을 타고 전세계로 전해졌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