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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인터뷰 / 조사시한 만료 의문사진상규명委 한상범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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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인터뷰 / 조사시한 만료 의문사진상규명委 한상범 위원장

입력
2002.09.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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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조사시한이 끝난지 꼭 열흘이 지났다. 2000년 10월 출범 이래 억울함을 호소하는 유족들의 흐느낌과 피조사기관 관계자들과의 고성으로 늘 떠들썩하던 위원회 사무실은 이제 조용해졌다. 올해 4월 위원장직을 넘겨 받을 때 "반민특위처럼 결국 핵심에는 접근하지 못한 채 끝나는 것 아닌가" 하고 걱정했다는 한상범(韓相範·66) 위원장. 조사기한 연장 등을 위한 특별법 개정을 기다리며 마무리 작업에 한창인 그를 서울 종로구 수송동 이마빌딩 위원회 사무실에서 만났다./대담=조재우 사회부 차장대우

■"원혼 아직도 많은데 분노를 끝낼때가 아니다"

―위원회의 성과에 대해 자체 평점을 매긴다면.

"40년 간 학생들 점수를 매겨왔지만 점수 체계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굳이 따지라면 합격점을 주고 싶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나름의 결과를 내놓을 수 있었던 데는 조사관 개개인의 사명감이 컸다."

― 조사 종결 후 위원회의 활동은.

"오히려 일이 더 많아졌다. 10월 중 대통령 보고를 해야 하고 내년 3월까지 대국민 보고서 및 국제연합 등에 보낼 영문보고서도 작성해야 한다. 인권개선안, 검시제도나 화장처리 등 사망자처리과정의 문제점, 유족에 대한 보상 문제, 의문사 발생원인과 예방책에 대한 포괄적인 내용 등이 포함된다."

―권한강화 없이 기한연장만으로 특별법 개정이 이뤄진다면 받아들이겠는가

"글쎄, 함정에 빠질 수 있는 질문인데…. 받아들인다면 상당수 사건 포기를 인정하는 게 되고, 죽어도 못 받아들이겠다고 하면 너무 이상주의적이라고 비판을 받을 것이다. 진행 상황을 보고 판단하겠다."

― 위원회가 서둘러 특별법에 대해 문제제기를 했더라면 조사종결 전에 개정이 가능했으리라는 지적도 있다.

"이미 지나간 것을 두고 책임여부를 따질 일은 아니다."

―국회 법사위의 한 의원은 "나머지는 검찰에 넘기면 된다"고도 했는데.

"지극히 무책임한 말이다. 의문사 사건은 검·경, 기무사 등 기존 수사기관에서 숱한 타살 의혹을 뒤로한 채 자살이나 사고사로 처리한 것이다. 기관 자체가 사건에 개입한 흔적도 있다. 이를 다시 그 쪽으로 넘긴다면 어느 유족이 조사결과를 받아들이겠는가."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국민들이야 장준하(張俊河) 선생 건처럼 큰 것에 관심을 가지겠지만 우리로서는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군 면제된 아들에게 어머니가 '아버지 직업도 공무원이니 군에 가라'고 설득해 입대 시켰는데 군에서 아들이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어머니도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따라 숨졌다. 월남전에서 전사한 한국군이 5,000명 정도인데 전두환(全斗煥)·노태우(盧泰愚) 정권시절 군에서 사망한 젊은이는 8,951명으로 거의 사단병력에 해당한다. 허원근 사건이후 군 일부에서는 '모독 당했다'는 반응도 나왔지만 군의 권리와 의무를 벗어난 비정상적인 행태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 것 뿐이다."

―조사가 재개될 경우 꼭 해결하고 싶은 사건을 꼽는다면.

"부드럽게 말해서 권위주의 정권, 정확히 군부독재 정권은 온 국민을 '이등병'으로 취급했다. 마음에 안 들면 계엄령이었고 민주주의를 위해 이의를 제기한 젊은이나 노동자, 지식인은 끌려가고 쫓기고 심지어 죽음을 당했다. 이들의 죽음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위원회의 성과가 클수록 일부 보수진영의 흠집내기도 만만치 않았는데.

"사무실에 '위원회 활동은 위헌이다'라는 헌법소원서와 조사결과에 항의하는 최종길(崔鍾吉) 교수 가해자의 청원서, 군 관련단체의 신문 광고들이 쌓여있다. 박태순 사건 브리핑 때는 기무사 고위간부가 찾아와 사무국장과 심한 말싸움까지 했다. 허원근 사건과 관련한 모 언론사 보도에 대해서는 언론중재를 신청해 놓은 상태다. 하지만 개의치 않는다. 이러한 것을 무서워했다면 위원장직을 왜 맡았겠나."

―특히 정보기관들과의 마찰이 심했던 것으로 보였다.

"정보기관의 전략을 개인적으로 '토막쳐서 찢어발겨 시간끌기'라고 표현한다. 쓸데없는 자료를 흘려서 '뺑뺑이'를 돌리거나, 1년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인 경우도 허다하다. 박창수(한진중공원 노조위원장) 사건의 경우는 1년 동안 요구해온 자료를 조사종결일에야 보내줬다.

정보기관에 대한 실사가 절실하다. 칠레 아옌데 대통령을 몰아내고 독재자 피노체트를 집권시키는 등 남미 쿠데타를 배후 조종한 미국도 나중에는 CIA 등 정보기관을 실사해 책임자를 가려냈다. 미 상원의원 중에는 18년 동안 정보기관에 대해 연구해 꾸준히 문제제기를 하고 책임을 묻는 일을 해온 이도 있다. 대표적으로 김대중(金大中) 대통령 납치사건도 정보기관이 개입됐음은 주지의 사실인데 해당 기관이 한번도 실사를 받은 적이 없다. 대통령 개인 차원에서 용서를 했다 해도 사회가 덮어둘 성질의 것은 아니다."

― 비(非)법률가들이 다수인 9명 위원이 사건을 판정하는 시스템에 대해 비판이 있는데.

"1920년대 프레드릭 로델이 '저주 받을진저, 법률가들아'라는 저서에서 법을 독점하고 단순논법에 의해 결정을 내리는 법률가들을 비판한 적이 있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9명 위원은 법률가(3명), 법학자(2명), 법의학자(1명), 현대사학자(1명), 행정고위관료(1명), 운동권 탄압을 직접 경험했던 교수(1명)로 구성돼 있다. 미 연방대법원에도 사회학자, 역사학자 등이 포함되어 있고 일본 최고재판소에도 여성문제전문가, 외교관, 노동문제전문가 등이 끼어 있다. 오히려 모두 법률가로만 구성된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보다 이상적인 형태다."

―의문사 사건도 결국 일제 잔재로부터 비롯됐다는 시각이 주목을 받고 있다.

"세지마 류조(瀨島龍三·전 이토추 회장)라는 일본인이 있다. 일본육사 창설이래 최고의 군인으로 꼽히는 그는 일제 침략전에서 활약했고 전후 일본 재계에도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다.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은 그로부터 종합상사와 수출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12·12사태를 일으키기 전 이를 일본대사관에 사전보고한 전두환 전 대통령도 그의 언질에 따라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유치 등 국내에 스포츠 붐을 일으키는 전략을 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권력에서 물러난 뒤 그로부터 신상자문까지 받았다고 한다. 군부독재 자체가 일본 세력과의 유착, 일제의 잔재와 뗄 수 없음을 의미한다. 광복 후 지금까지 단 한번의 친일파 청산작업도 없이 그의 후손들이 오히려 사회 지도층을 이루면서 우리 사회에 잘못에 따른 징계와 사죄의 풍토가 사라졌고 민주주의가 왜곡됐다."

―위원회가 남아공의 '진실과 화해 위원회'와 자주 비교된다. 위원회의 목표도 결국은 '화해와 통합'으로 나아가자는 것 아닌가.

"청산도 안됐는데 화해가 가능한가? 용서를 빌지도 않고 참회를 하지도 않는데. 남아공의 경우 가해자의 참회와 진상규명 참여가 큰 힘이 됐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통합이라는 말도 애매하다. 모든 분란의 소지와 토론을 없애고 꾹꾹 눌러서 조용히 살자는 논리 자체가 전체주의, 독재주의적이다. 반대자와 소수자가 공존할 수 있을 때만 진정한 통합이 가능하다. 위원회의 일은 바로 그것을 위한 작업이다."

― 위원회를 주시하고 있는 국민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위원회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그리고 앞으로 어디까지 갈지 모두 국민의 관심에 달려있다. 우리 활동을 전달해준 언론과 이를 통해 형성된 여론의 공감과 지지를 통해 그나마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감사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아직도 국민들이 알고 분노해야 할 사건들이 많다. 제발 더 많은 분노와 관심을 가져달라."

/정리=이진희기자 river@hk.co.kr

■韓위원장은 누구

한상범 위원장은 가족들이 "벼락맞는 자리 같다"며 극구 말렸던 의문사위 위원장직을 맡게 된 이유를 "어렵다고 모두 고사해서 내게 온 것 같은 데, 마지막 봉사라고 생각해서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40년 간 동국대 법대 교수로 재직해 온 그는 올해 3월까지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을 역임하며 친일청산과 인권개선에 앞장서 왔다. '가진 자들의 권력으로 쓰이는 법'에 대해 심한 혐오감을 표현해온 법학자로도 유명하다.

그 자신도 의문사 사건들이 발생했던 군사독재 시절을 힘겹게 걸어왔다. "1960년대 말 서울 을지로6가 곱창집에서 혼자 소주를 마시면서, 당시 정권에서 내건 '대망의 70년 대'라는 구호에 대해 '별 거지 같은 것 다 보겠네'라고 혼잣말을 한 적이 있는데 이 말을 들은 손님들이 나를 피해 모두 나가버리더군요."

80년에는 학장으로서 시위 학생들을 따라다니며 숙식을 제공한 것이 적발돼 계엄합수부에 의해 긴급 체포되기도 했다.

그는 추리소설 마니아이기도 하다. 뜻밖이라고 했더니 똑 부러지게 답변했다.

"논픽션으로 머리를 불태우고 추리소설로 머리를 식힙니다." /이진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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