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차례의 청와대 회담을 하면서 나는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에 대한 인식을 조금 달리하게 됐다. 정권을 잡기까지의 과정을 생생히 지켜본 나로서는 애당초 결코 그에게 호감을 가질 수 없었다. 그러나 수 차례 만나는 동안 그가 남의 말을 들을 줄도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당시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이 크게 영향을 미쳤지만, 어찌됐든 그는 개헌과 관련해 조금씩 유연해진 게 사실이다.그런데 문제는 당시 전 대통령이 자신의 임기 안에 개헌을 하되, 대통령 직선제가 아닌 내각제를 염두에 두고 있는 점이었다. 국민이 원하는 것은 대통령 직선제였기에 나는 이를 어떻게 관철해야 할지 걱정이 됐다.
그러나 그 일은 우선 헌법특위를 구성한 뒤에 고민할 일이었다. 여야는 서로 다른 속셈을 가진 채 1986년 6월24일 헌법개정특별위원회 구성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8월8일 우리 당과 신민당은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한 헌법개정안을 헌법특위에 제안했다. 민정당은 열흘 뒤에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냈다.
8월25일 4차 헌법특위에서는 각 당의 제안 설명이 있었다. 신민당에서는 이민우(李敏雨) 총재가, 우리 당에서는 내가 나섰다. 1년 반 여 전에 국민당 총재로 취임하면서 처음으로 헌법특위 구성을 제안한 후 우여곡절 끝에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니 감개무량했다.
"평화적인 정권 교체와 이를 토대로 한 참다운 민주주의의 구현을 위해 새로운 민주헌법의 마련은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이 시대의 지상명령입니다. 개헌은 대통령 직선제로 이뤄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온 국민이 직선제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직선제 개헌은 또 오늘의 분열된 국론을 통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헌법특위는 제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공청회 운영이라는 사소한 문제에 걸려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민정당은 좁은 장소를 고집했고, TV 생중계도 반대했다. 개헌 열기가 확산되는 것을 꺼린 것이다. 신민당은 정반대였다.
양 당이 갑론을박하는 바람에 헌법특위는 간사회의도 제대로 열지 못한 채 겉돌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신민당은 부산에서 단합대회 명분으로 대규모 직선제 홍보집회를 열었다. 이에 질세라 민정당은 지방별로 내각제 개헌 홍보대회를 열었다.
우리 당은 달랐다. 공청회에 대비, 지역별 공술인을 확정하는 등 나름대로 준비를 열심히 했다. 부산 지역의 우리 당 공술인은 지금의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대통령후보였다. "그 지역에서 가장 유능한 법률가를 물색하라"는 내 지시에 따라 당이 추천한 사람이 노 후보였다. 공청회가 불발, 결국 서로 만나지는 못했지만 나와 노 후보의 인연은 바로 그 때 처음 시작된 셈이다. 노 후보는 당시 변호사로 정계에 진출하기 전이었다.
그러나 공청회는 신민당과 민정당의 장외경쟁으로 결국 열리지 못했다. 헌법특위가 9월 중순까지 계속 공전하자 마침내 학원과 재야쪽에서 헌법특위 분쇄론이 나왔다. 합의 개헌은 커녕 정쟁만 일삼는 정치권에 대한 실망의 표현이었다.
9월29일 문제가 터졌다. 신민당 이민우 총재가 김영삼(金泳三) 김대중(金大中)씨와 3자 회담을 연 뒤 "양 김씨와 전두환 대통령과의 실세 대화가 있기 전 까지 헌법특위 활동을 일시 중단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나는 헌법특위의 앞날이 걱정이 됐다. 이러다간 자칫 헌법특위가 아무 일도 하지 못한 채 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경우 합의 개헌은 물 건너가고, 정국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으로 빠져들지 모른다는 게 당시 내 판단이었다.
나는 신민당의 행동이 경솔했다고 여겼다. "실세 대화는 나름대로 추진하면서 헌법특위는 정상 가동하는 것이 옳다. 3당 대표간 합의로 구성한 헌법특위를 일방적으로 내팽개친다면 이는 무책임한 정치행위가 아닐 수 없다."
신민당은 10월7일 군산에서 직선제 개헌 추진대회를 여는 것을 시작으로 다시 본격적으로 장외 투쟁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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