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의 K초등학교 3학년생들은 이달 들어 거의 매일 '쪽지시험'을 치르고있다. 담임교사가 25개의 셈하기 문항이 담긴 쪽지를 학생들에게 나눠주면서 "곧 있을 중요한 시험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도 잊지않는다. 서울 강북에 있는 B초등학교도 최근 3학년생을 대상으로 국어·수학·사회·과학 과목의 월말고사를 치렀다. 전에는 볼 수 없던 장면이다.
▶초등생 시험 회오리
초등학교에 때아닌 '시험열풍'이 몰아치고있다. 교육부가 전국 초등학교 3학년생 62만명을 대상으로 '기초학력 진단 평가'를 10월15일 실시한다고 발표한 3월 이후 각 초등학교에서는 앞다퉈 각종 학력시험을 치르는가 하면 보습학원에 별도로 다니는 학생도 늘어나고 있다. 문제풀이집도 불티나게 팔린다. 일부 학원은 '기초학력 대비반'까지 만들었다. 대입수능시험을 방불케한다.
시험을 20여일 앞두고 공부바람은 한층 가열되는 분위기다. 서울 A초등학교는 수업 시간에 학습지 회사의 예상 문제집을 풀며 숙제를 내주고 있고, 경기 의정부 C초등학교는 월말시험 성적을 게시하는 등 벌써부터 학생들간 경쟁심을 유발하고 있다.
지방도 예외는 아니다. 전남도교육청은 순천 고흥 등 일선 초등학교에 월례·학력고사를 부활시켰다. 대전과 부산, 제주지역 교육청은 각 지역내 초등학생 전원을 대상으로 두차례 이상씩 학력고사를 이미 실시하는 등 '실전'에 대비하고있다.
학부모들도 안달이 나기는 마찬가지. 최근 2개월여 사이 동네 셈하기 보습학원에 아이들을 보내는 엄마들이 부쩍 많아졌다. 이모(38·서울 성북구 돈암동)씨는 "3학년 엄마들 사이에 '이번에 기초학력 부진아로 판정받으면 중·고교는 물론 대학에 갈때까지 불이익을 받는다'는 근거없는 말들이 무성하다"고 전했다.
▶시험 어떻게 치러지나
기초학력진단평가는 말 그대로 기초학력이 부진한 학생의 규모와 학력부진 정도를 파악, 이들을 특별 지도하기위한 판정기준을 마련하기위해 도입됐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읽기 쓰기 셈하기 등 3개 영역에 걸쳐 문제를 출제하며, 채점은 학급 담임교사가 맡아 OMR카드에 입력 후 지역교육청을 거쳐 평가원에 보낸다. 개인별 성적이 산출돼 학교와 학부모에게 통보된다.
1998년 '수·우·미·양·가'식의 서열 매기기가 중단된 이후 5년 만에 초등학생의 학업평가가 사실상 부활되는 셈이다.
일정 수준에 미달하는 학생들은 '기초학력 미달자 관리카드' 작성 대상자로 분류되고, 학력이 계속 오르지 않을 경우 고학년이나 중학교에 올라가도 별도 교육을 받아야한다. 교육부 김원찬(金元燦·40) 평가관리과장은 "기초학력이 부진한 학생에게는 학습결손 없이 상급학교까지 원만한 교육을 이어갈 수 있도록 특별 교정 프로그램을 제공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시행을 둘러싼 진통
교육부의 기초학력진단 평가 계획은 일찌감치 확정됐지만 일선 교육계와 전교조, 시민단체 등에서는 "득보다 실이 많다"며 시행취소를 요구하는 등 논란이 계속되고있다. '문화개혁을 위한 시민연대'는 최근 성명을 내고 "기초학력 진단평가는 도·농, 강남·북간 학력 차이가 크게 나타날 수 있어 학교간 위화감을 조성할 수 있다"며 철회를 촉구하기도했다.
교육부는 이에 대해 "교육청별 학교별 학생개인별 서열화 자료는 산출하지 않는다"며 "미국은 3학년에 기초학력을 평가하고 영국도 입학후 3년이 지난 뒤 국가차원의 1단계 평가를 실시하고 있어 진단평가는 반드시 필요한 제도"라고 말했다.
/김진각기자 kimjg@hk.co.kr
■일선 교육계 "학교 서열화 우려"
초등교 3학년 기초학력 진단평가의 전국적 실시에 대해 교원·학부모 단체와 전국 16개 시·도 교육감들이 잇따라 반대의사를 표명하고 나서는 등 반발이 확산되고 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은 25일 기자회견을 갖고 "교육부가 교과전담교사 확충 등 교육여건 개선은 외면한 채, 졸속적인 평가 추진으로 초등교육을 더욱 황폐화하고 있다"며 진단평가가 시행되면 관련 업무를 거부할 뜻을 밝혔다.
이에 앞서 전국 16개 시·도교육감들은 24일 모임을 갖고 "진단평가를 전체 평가 대신 표본집단을 뽑아 실시할 것"을 교육부에 건의키로 했다.
교육감들은 이번 진단평가가 전국 62만명 초등생 전체를 대상으로 실시될 경우 "학교간 서열화가 이뤄질 수 있고 학교간 경쟁이 과열될 수 있는 만큼 시행방법과 결과의 활용 등은 시·도교육청에 위임할 것"을 요구했다. 또 서울시의 학교운영협의회와 교육시민단체들도 진단평가의 즉각 철회를 주장했다.
이처럼 진단평가의 구체적 시행을 주관하게 될 교육감과 시험 감독등 실무를 맡을 교사단체가 한 목소리로 반대하고 나서, 다음달 15일로 예정된 시험의 실시 여부가 불투명한 전망이다.
일선 교육현장의 주역들이 진단평가에 대해 반대하는 이유는 전국을 대상으로 한 획일적 평가가 학교 구성원 모두를 성적과 석차에 매달리게 하고 사교육비를 증대시키고 학교를 서열화할 우려가 크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더욱이 이번 시험에서는 학생 개인별 성취수준이 학교와 학부모들에게 통보되기 때문에 일선 교사와 학부모들은 "잘 치뤄야 한다"는 강박감을 느끼고 있다. 반면 2000년 7차교육과정 실시 후 초등교 저학년 학생들은 대단위 지필고사를 치뤄 본 경험이 거의 없어 일선 교사들은 당혹감마저 느끼고 있다.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도 "교육부가 전원시험을 고집하면서도 시험실시가 한달도 남지 않은 지금까지도 시험수준이나 평가유형을 제대로 홍보하지 않고 있어 학교와 학부모의 불안이 가중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정영오기자 young5@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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