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시대에 처음 세워진 절인 감은사(感恩寺) 터는 경북 경주시 감포읍 용당리, 토함산에서 발원한 대종천이 동해와 만나는 곳의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건물은 흔적만 남았지만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바로 돌을 다듬어 세운 쌍탑(雙塔)이 웅장한 자태로 서 있어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신라인들의 종교관과 예술혼을 느끼게 한다.문무대왕이 삼국통일 대업을 이룬 뒤 부처님의 힘으로 왜구의 침입을 막고자 절을 세우다 완성하지 못하고 타계하면서 "내 죽으면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자 하니 화장해서 동해에 장사 지내라"고 유언했다. 아들인 신문왕이 그 뜻을 받들어 장사 지내고 이듬해인 682년 감은사를 세웠으니 이곳은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려 한 문무대왕의 충(忠)과 부왕의 은혜에 감사해 절을 완성한 신문왕의 효(孝)가 함께 깃든 곳이다.
국립박물관은 1959년 절터가 황폐해가는 것을 보다 못해 발굴 조사에 착수했다. 그러나 당시 절터에는 민가 30여 채가 마을을 이루고 있어 겨우 마당이나 주변의 남은 공간만을 파보는 정도여서 기초적인 자료 확보에 그쳤다. '삼국유사'에는 법당 섬돌 밑에 동쪽으로 '용혈(龍穴)'이 나 있어 동해용(東海龍)이 된 문무대왕이 이 구멍을 통해 법당에 들어와 쉬어갈 수 있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그 흔적도 찾지 못한 채 마무리되었다.
그 후 20년이 흐른 1979년에야 대대적인 유적 정비 계획이 세워져 민가들을 보상 철거하고 전면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할 수 있었다. 필자는 발굴조사의 총책임을 맡았다.
발굴 결과 법당의 기단에 지금까지 발견된 예가 없는 특이한 형태의 공간이 발견됐다. 이곳이 바로 문무대왕의 휴식을 위해 마련된 상징적 공간이었던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아울러 20년 전 그렇게 찾고자 애썼으나 허사로 끝났던 이른바 '용혈'의 흔적도 확인해 옛 사람들의 기록이 얼마나 정확했는지를 다시 한번 밝히게 됐다.
감은사 터 발굴은 여러 가지 얘기를 간직하고 있다. 최초 발굴이 이뤄진 1959년은 추석 무렵 그 유명한 태풍 '사라' 호가 경상도 지방을 휩쓸고 간 해였다. 감은사 터가 있는 용당리는 마을 앞 대종천이 범람해 모든 논과 밭이 자갈무지로 변해버린 상황이었다. 발굴 조사를 위해 마을에 갔을 때는 전기시설이 없어 호롱불 신세였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초등학교도 다니기 어려운 열악한 형편이었다. 한번은 대여섯 살쯤 되어보이는 아이가 온몸에 종기가 난 것을 보고 조사단에서 비상약으로 가져간 마이신을 먹였더니 종기가 아물었다. 이것을 본 동네 사람들이 감기에 걸리거나 배탈이 나도 발굴단 숙소로 몰려들어 발굴 조사보다 어설픈 의료봉사에 시간을 더 보낼 지경이었다. 심지어 첫 아이를 낳은 아낙이 젖앓이를 한다며 체면 불구하고 치료해달라고 가슴을 풀어 내미는 통에 혼비백산하기도 했다. 젖꼭지 주위에 머큐로크롬을 발라주고 소화제를 먹도록 했는데 신기하게도 효험이 있었다. 어쨌거나 이때의 발굴조사로 마을에서는 최소 20년은 빨리 개명됐다고 믿게 되었다.
20년 뒤 전면 발굴조사를 위해 다시 마을을 찾았을 때도 형편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빼어난 자연 풍광이 그대로 남아 흐뭇했다. 대종천의 은어는 깨끗하기 그지없어 날로 먹어도 디스토마균에 감염될 걱정이 없었다. 요즘은 활짝 펼쳐진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 수많은 관광객이 오가고, 여름이면 대종천과 동해에 피서객이 몰려들면서 강이며 바다를 오염시켜 그 흔하던 대종천의 은어를 구경하기도 힘들 지경이 되었다. 사람이 살기 편해지면서 자연도 망가뜨리지 않는 상생의 길은 없는 것인지, 안타까울 뿐이다.
조유전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문화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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