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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워치]남북의 엇갈린 행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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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워치]남북의 엇갈린 행로

입력
2002.09.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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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사회주의 모범생으로 불린 옛 동독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은 이념과 체제의 총체적 실패 탓이다. 냉전 대치와 봉쇄라는 외부 요인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이는 분명하다. 그러나 동독 체제가 서독에 비해 모든 면에서 열등했다고 말하는 것은 역사 왜곡이 될 수 있다. 동독이 자부했을 뿐 아니라 서독의 양심적 지식인들이 인정한 우월성 가운데 두드러진 것이 반 나치 투쟁과 나치 과거 청산에 훨씬 용감하고 철저했던 사실이다.동독의 반 나치즘은 나치와의 전쟁에 가장 큰 희생을 치르고 승전에 결정적으로 공헌한 소련의 위성국으로 출발한 태생 때문만은 아니다. 동독 체제의 주축은 홍안의 소년 시절 반 나치 투쟁과 대독 전쟁에 참여한 붉은 전사(戰士)들이었다. 소련이 나치 제국의 심장부를 점령한 것이 나치 타도의 논공행상 결과였듯이, 그 곳에 정권을 세운 동독 공산주의자들이 정통성의 우위를 주장한 근거도 수긍할 만 하다.

서방 연합국이 점령한 서독 지역에서도 나치 청산은 있었다. 그러나 초대 총리 아데나워를 비롯한 체제의 중추는 반 나치 투쟁과 무관하게 서방이 선택한 테크노크라트들이었다. 정치 지도자들의 독일군 경력도 크게 시비되지 않았다. 이들이 주도한 서독은 서방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이식받아 체제 경쟁에서 끝내 동독을 압도했다. 그러나 작가 귄터 그라스 등 진보적 지식인들은 동독의 소멸을 아쉬워했다. 반 인종차별주의와 사회적 연대 등에서 앞선 이상주의 모델이 사라지면, 서독 사회의 자기 교정 능력 또한 쇠퇴해 정의가 타락할 것을 우려한 때문이다.

이런 독일적 인식은 불행하게도 우리에게 생소하다. 동족상잔 전쟁의 악몽에 짓눌려 반 세기를 적대한 탓이다. 이 때문에 남북 화해의 감동을 경험하고서도 북한의 존재, 특히 최근의 역사적 변화에 대한 인식은 구태의연하다.

북·일 정상회담 언저리에서 우리 보수 언론과 학자들이 일본의 식민지배 사죄와 배상을 제쳐두고 일본인 납치 문제를 덩달아 부각시키는 것은 역사 인식의 도착(倒錯)에 다름 없다. 일본이 납치 문제를 최대 이슈로 들고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국내 여론에 대한 배려와 함께 북한의 명분을 상쇄하려는 계산이 작용한다. 이를 모를 리 없는 북한이 '원수 같은 일본제국주의'를 다시 외치지 않은 채 서둘러 납치 문제를 시인·사과한 것은, 그만큼 일본과의 화해와 경제적 지원이 절실한 때문이다. 우리가 이런 북한의 처지를 안타까워 하거나 좀 더 의연할 것을 주문하기는커녕, 납치 문제를 마치 제 일처럼 떠드는 것은 민족과 역사를 망각하는 어리석은 짓이다.

북한이 일본 민간인을 납치한 것은 국제적 범죄다. 그러나 일부 영웅주의자들의 망동이든 국가 차원의 범죄이든 간에, 일본 제국주의가 저지른 국권침탈 등의 범죄행위와는 그 중대함을 비교할 수 없다. 그 것이 100년 전 시작해 60년 전 끝났다고 해서, 20∼30년 전의 납치 사건 몇 건으로 덮을 여지는 없다. 이런 사리를 외면하는 것은 우리가 북한보다 일제 잔재 청산에 소홀했고, 북한보다 궁핍하던 1960년대 일제 과거 추궁과 경제개발자금 5억 달러를 맞바꾼 자격지심 탓이 아닌지 되돌아 봐야 한다. 그 것도 아니라면 무작정 북한을 혐오, 민족의 이익은 도무지 헤아리지 않는 맹목적 행태에 불과하다.

미국의 대북 압박과 일본의 북한 접근, 신의주 특구 개발 등 북한의 대외 개방을 둘러싼 중국과 유럽의 적극 개입 등은 북한과 한반도 정세의 격변과 치열한 국익 다툼을 예고한다. 이런 전환기 상황과 북한의 변화를 주도적으로 이끌지는 못하더라도, 북한의 의도를 음해하고 성공적 변혁 가능성을 미리 부정하는 악의적 주장들에 물색없이 동조하지는 않아야 한다. 북한 체제가 완전히 실패해 붕괴한 자리를 우리가 기꺼이 수습할 의지와 힘이 없다면, 그들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돕는 것이 지혜이자 도리일 것이다.

강병태 편집국 부국장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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