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에 스러진 꿈·열정…"소설은 내 영혼의 치유제"내가 소설이라고 처음 써 본 것은 대학 삼학년 무렵이었다. 대학시절의 나는 그야말로 천방지축이어서 당시 법대생이었던 평론가 이동하 형이 나를 일컬어 '행복한 낭만주의자'라고 놀렸던 것이 기억난다. 하지만 그 시절의 낭만이란 장발에 통기타와 생맥주를 빼고는 온통 암흑과 같았던 유신 치하의 낭만이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우울하고 갑갑하던 시절이었다. 가끔 김민기가 잡혀가서 죽도록 얻어터져 병신이 되었다더라는 소문도 들렸고, 가리봉동 어느 공장에서 여공들이 똥물을 뒤집어썼다더라는 풍문도 들렸다. 우리는 최인호의 '바보들의 행진'을 읽으며 낄낄거렸고, 황석영의 '객지'를 읽으며 무언지 모를 비장함에 잠기고는 했다. 그런 시절이었다. 친구 중의 한 녀석이 군대를 갔다. 내가 다니던 국립대도 아닌 삼류대에 다니던, 지지리도 가난했던 놈이었다. 그 녀석과 청계천에서 통행금지 때까지 술을 마시고 사이렌과 함께 차와 사람이 거짓말처럼 사라진 텅 빈 거리를 소리치며 걸어가다가 경찰에게 잡혔다. 낼모레 군에 갈 놈이라니까 근처에 있는 여인숙으로 들어가라고 보내주었다. 담배가게 이층의 쓰러져가는 여인숙, 겨우 계단에 매달리다시피 하여 올라갔다.
돈이 없어 시계를 끌러주고 주머니를 털어 소주 댓병을 사왔다. 이불에서는 곰팡이 냄새가 나서 도저히 누울 수도 없었다. 엉망으로 술에 취한 그 친구는 기어코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그리고 "복수할거야, 복수할거야"라고 밑도 끝도 없이 혼잣말처럼 뇌까렸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그 밤을 온통 추위와 이유없는 청춘의 아픔과 설움에 젖은 채 그와 함께 보냈다. 그리고 새벽에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그 '소설'이란 것을 썼던 것이다. '닭'이라고 이름 붙여진 그것은 제목 그대로 날개를 잃어버린 채 대가리를 땅에 처박고 지렁이를 찾는 닭의 족속에 빗대어 우리의 탈출구 없는 청춘을 이른바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그린 것이었다. 그것으로 나는 대학신문사에서 주최하는 대학문학상을 타서 일약 대학문단의 혜성 같은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세상은 내게 조용히 문학을 하거나, 혹은 '엄밀한 학으로서의 철학'을 하도록 가만히 내버려두질 않았다. 사실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철학도로서 상당한 자부심과 탐구심을 가지고 있었고, 세상의 본질과 이면을 개념에 의해 논리적으로 추구하는 작업에 커다란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유신의 발톱은 나처럼 감수성이 강하고 세상일에 관심이 많은 친구들을 사정없이 나꿔채 어디론가 데려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당시 나는 학보사 편집 일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요주의 인물로 찍혀 있었는데 대학 사학년 말미의 초겨울, 밤에 등사기를 들고 가다가 기어코 들키고 말았다. 초겨울 비가 추절추절 내리던 날 나는 마치 오랫동안 예감되어온 것처럼 어딘가에 내팽개쳐졌는데 그곳은 바로 영점칠평의 어두운 감옥소 독방이었다. 시골 한의사의 십남매 중 아홉번째로 태어나 가장 총명하다고 서울까지 유학 보낸 나의 추락은 실로 우리 집안의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이로부터 오년, 나는 세상의 밖에서 살았다. 발도 제대로 펴지 못하는 독방에서 일년여 있다가 다시 여러명이 어울려 사는 방에서 반년을 보내고 나오자 집으로 영장이 날아와 있었다. 이번에는 군대로 가라는 전갈이었다. 말하자면 유배를 보내는 것이었다. 오랜 단식으로 몸이 말이 아니었다. 병석에 누워계신 늙으신 아버지를 뒤로 하고 병무청 직원과 담당 형사와 함께 훈련소로 떠났다. 늦은 가을 코스모스가 바람에 비누방울처럼 날리고 있을 때였다.
전방 포병부대에 가있는 동안 광주사태가 터졌다. (광주민주화운동보다 내겐 이 말이 더 사실적으로 들린다.) 그러자 보안대에서 불렀다. 근 보름 동안 잠을 재우지 않는 모진 고문이 가해졌다. 짐승의 시간이었다. 모든 것이 문자 그대로 적막강산 그 자체였다.
내가 이 길고 긴 터널을 빠져나온 것은 1982년 겨울이었다. 그동안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독재의 권좌에는 박정희 대신 전두환이 앉아있었다. 복학은 하였지만 어느 곳에도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같이 감옥을 살았던 후배, 그 후 영화감독이 된 여균동의 집에 빈대살이를 붙었다. 몸도 마음도 사막과 같은 시절이었다. 고문 후유증으로 헛구역질을 하고 비가 내리거나 어둡거나 하면 까닭 없는 불안에 시달렸다. 취직이 되지 않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윤구병 선생을 만났더니 마침 잘 되었다며 출판사에다 취직을 시켜주었다.
소설을 쓰고 싶었다. 아니, 소설이 아닌 그 무엇이라 하더라도 끼적거려보고 싶었다. 나는 정신적으로 어딘가가 망가져 있었고, 자칫 잘못하면 돌이킬 수 없도록 치명적일 수도 있겠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열과 발작의 경계에서 위태롭게 자신을 추스리며 서있었다. 나는 글쓰기에서 어떤 희망을 찾았다. 자신을 서술하는 것, 자신의 삶의 중심과 의미를 찾아가는 것, 그리하여 내가 살았던 것, 우리들이 살았던 것, 대학시절 가리봉동 공장 어두운 담장 아래로 걸어가며 수없이 되뇌었던 것,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와야 한다는 것, 독재자의 죽음을 선언하고 민주주의를 노래하는 것, 감옥과 지하 고문실과 강원도의 달빛과 감자꽃에 대하여…아니, 아무 것이라도 좋으니까 글을 쓰고 싶었다.
나는 사람들이 다 퇴근하고 난 출판사의 책상에 앉아 하루에 한 편의 단편을 쓰기로 작정했다. 그 첫번째 소설이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였다. 창작과비평사에 갖다 주었더니 당시 계간지는 폐간되고 없었던 터라 신작소설집에 넣어주었다. 실로 십여년만에 다시 '소설가'로 등단한 셈이었다. 그리고 나서 '포도나무집 풍경' '멀고 먼 해후' '벌레' 등 많은 단편들을 잇달아 발표하였는데 어떤 해에는 그해 작가들 중에서 가장 많은 작품을 발표한 작가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사이 시집 '겨울바다'를 세상에 냈다. 김명인의 긴 발문이 붙어있는 이 시집은 이제 절판이 되었지만 칠십년대 세대인 우리가 살아온 초상화 같은 것이어서 지금도 읽으면 내 속에 잠들어있던 피가 끓어대는 것 같다.
그러니까 나의 문학은 나의 병력(病歷)과 다름 아니다. 다만 그 병이란 게 광풍처럼 우리를 휩쓸었던 배반의 역사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는 점에서 다소간의 객관적 정당성을 찾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나이가 들면서 나도 괴로웠던 젊은 시절의 추억, 폐쇄회로와 같은, 회색빛 겨울날과 같은, 기억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오래되고 무거운 낡은 옷처럼… 훌훌 벗어 던져버리고 싶었다. 그리하여 난 세상의 도처를 떠돌아다니며 여행을 했다. 낯선 세상, 낯선 거리에 서면 열병처럼 앓았던 내가 보이곤 했다.
지난 겨울 내내 나는 장편을 쓰기 위해 조립식으로 지은 서울 근교의 허름한 화실에서 보냈다. 폭설로 길이 끊어지고 보일러가 얼어터져 불씨 하나 없는 방에서 한밤중 나는 혼자 한마리 거대한 벌레처럼 변해 꿈틀거리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징그럽고도 괴기한 모습이었다. 그때 나는 문득 이것이 이 생에 지워진 나의 숙명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바로 나는 작가라는 것이다. 작가란 유리구두를 신은 신데렐라처럼 설사 그 누가 읽어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계속 무언가를 쓰고 있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인 것이다. 목마른 열정으로 차있던 나의 청년기가 나로 하여금 이 문학의 숲 입구에 서 있게 하였다면 작가라는 선택된, 어쩔 수 없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지금 이 숲을 지나가게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나는 행복한가? 그렇다. 지극히 행복하다. 나는 이제 내 인생에 겸손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으며 시간의 강 위에 흘려보내야 하는 것과 남겨두어야 하는 것도 알고 있다. 헛된 명성에 눈멀지도 않고 내 능력 밖의 일 때문에 부대끼지도 않는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몫만한 삶이 있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어떤 작가에게나 자신의 몫만큼 주어진 소명이 있을 것이다. 나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내게 주어진 몫의 삶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작가로서 내게 주어진 소명에 대해 생각한다. 꽃은 백화난방(百花亂邦) 해야 아름답고 새는 백조쟁명(百鳥爭鳴) 해야 아름다운 법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선후배 작가들이 내겐 문득 모두 꽃이며 새처럼 보인다. 보잘 것 없는 재능이지만 나 역시 그 중의 하나가 되어 꽃 피우고 노래하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숙명일까.
김영현
●연보
1955년 경남 창녕 출생
1982년 서울대 철학과 졸업
1984년 창작과비평사 발행 14인 신작소설집 '지 알고 내 알고 하늘이 알건만'에 단편소설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발표 등단
1997년∼현재 실천문학사 대표
소설집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 '해남 가는 길'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마음의 망명정부' 장편 '풋사랑' 시집 '겨울바다' '남해엽서' 등
한국일보문학상(1990)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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