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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민둥산/들어봐, 억새의 속삭임 느껴봐, 은빛 가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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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민둥산/들어봐, 억새의 속삭임 느껴봐, 은빛 가을을…

입력
2002.09.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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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깊어지면 화전(火田)을 일구듯 산꼭대기에 불을 놓았다. 거창한 농사는 아니었다. 그저 봄나물이 무성하기를 바랐다. 매년 불길에 데인 산꼭대기에는 한 그루의 나무도 남지 않았다. 벗겨진 땅에는 잡초만 흔들린다.민둥산(강원 정선군 남면·해발 1,117m)은 그렇게 이름과 모습이 같다. 공들여 벌초한 커다란 왕릉을 대하는 느낌이다. 꼭대기 뿐 아니라 속살도 밋밋하다.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나 감탄을 자아내는 기이한 바위도 없다. 그래서 등산 코스로는 인기가 높지 않다.

그러나 민둥산은 가을로 접어들면 갑자기 '명산'이 된다. 드넓은 정상 평원에 불밭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하얀 억새의 불꽃이다. 한꺼번에 타올랐다가 이내 식어버리는 불이 아니다. 이달 말부터 서서히 붙기 시작해 눈이 내리기 전까지 이어진다. 억새는 이미 붉으스레한 꽃대를 내밀었다.

민둥산 산행의 매력은 오르기 쉽다는 것이다. 코스가 길지 않고, 너덜지대(바위 지대) 등 난코스가 거의 없어 가족 나들이에 적격이다. 가장 긴 길을 선택해도 왕복 4시간 30분 정도. 어린아이는 걸리고 젖먹이는 업은 채 산에 오르는 이들도 많다.

산행은 증산역에서 멀지 않은 증산초등학교 옆에서 시작된다. 평탄한 길을 약 40분 걸으면 낙엽송이 빽빽한 길이 나타난다. 하늘을 찌르듯 거침없이 직립한 나무들. 장엄미까지 느껴진다. 10월 중순부터 낙엽송은 황금색 옷으로 갈아 입는다. 그리고 황금바늘을 뿌리듯 뾰족한 낙엽을 마구 떨구어낼 터이다.

20분을 더 걸으면 발구덕이다. 본격적인 산행의 출발점이다. 산 옆구리의 능전마을에서 출발하면 발구덕까지 차로 오를 수 있다. 그러나 길이 1차선이라 사람이 많이 몰리는 주말에는 오도가도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산 아래에 차를 놓고 발로 올라야 시간을 오히려 절약할 수 있다.

발구덕이라는 지명이 특이하다. 정선 지역에는 특이하고 예쁜 땅이름이 많다. 아우라지, 아살미, 구슬골, 먼저골…. 발구덕도 그 중 하나이다. 발구덕은 여덟개(팔)의 구덩이(구덕)라는 의미이다. 팔구덕에서 발구덕으로 음이 변했다. 이 지역은 어마어마한 석회석지형. 지하수가 땅 밑의 석회석을 녹여 공간이 생기면 표면의 땅이 함몰해 구덩이가 된다. 지질학 용어로는 돌리네(Doline)이다. 무심코 지나치면 평범한 능선 같지만 알고 보면 커다란 구덩이가 연이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한반도에서는 흔치 않는 지형이다.

발구덕에서부터 길은 조금 가팔라진다. 갈 지(之)자로 능선을 타고 오른다. 아직은 짙은 숲 속. 정상을 약 400m 남기고 하늘이 벗겨지기 시작한다. 무성했던 숲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잡초만이 무성한 직선길이 나타난다.

정상에 선다. 산불감시 초소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민둥산 정상은 무심코 보면 싱겁기 짝이 없다. 먼저 눈을 높이 든다. 사위가 산의 바다이다. 남동쪽으로 민족의 영산 태백산이 코 앞에 있는 듯 우뚝 솟아있고, 동서남북으로 높고 낮은 봉우리들이 파도 치듯 펼쳐진다. 이제 산들은 색깔을 바꾸기 시작했다. 푸른 녹음으로 여름을 지키던 산들은 가을을 준비하느라 검푸르게 변해있다.

거친 강원도의 산세에 취할 즈음 시선을 아래로 내린다. 한숨이 훅 나온다. 민둥산의 정상 평원은 오로지 억새 한가지만 군락을 이룬 것 같다. 사람들이 걸어다니는 좁은 등산로를 제외하고는 온통 억새꽃의 물결이다. 거대한 솜이불 위에 서 있는 느낌이다.

민둥산의 억새는 유난히 희다. 그 하얀 아름다움을 제대로 보려면 해가 뉘엿뉘엿 기우는 오후에 올라야 한다. 역광으로 대하는 억새는 은빛으로 반짝거린다. 최고의 가을 추억이 만들어진다.

/정선=글·사진 권오현기자 koh@hk.co.kr

▶정선에 가려면 영동고속도로 새말IC에서 빠져 42번 국도를 타고 안흥-평창을 거치는 방법이 가장 편하다. 평창에서 미탄을 지나 정선읍내 입구에서 오른쪽 동면방면(33번 지방도로)으로 방향을 잡고 덕우리 삼거리에서 왼쪽 421번 지방도로를 타면 화암관광지에 이른다. 소금강 지역에서 우회전, 계속 421번 지방도로를 타고 약 10㎞를 달리면 산행의 출발지인 증산초등학교에 닿는다. 서울 동서울터미널에서 정선행 시외버스가 1일 11회 운행한다. 정선읍에서 남면, 사북행 시내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정선 시내버스 터미널 (033)563-1094

▶정선 관광의 가장 큰 약점은 숙박시설이 부족하다는 점. 민둥산 인근도 예외는 아니다. 동면의 화암관광지 인근에 잠을 잘 수 있는 시설이 있다. 정식 숙박시설은 화암장호텔(033-562-2374)이 유일하다. 화암약수터와 몰운대 주변에서 야영을 할 수 있고 민박집도 많다. 정선군 민박협회(033-562-5525) 몰운대지구(033-562-5894)등에 연락하면 안내를 받을 수 있다. 정선군 문화관광과 (033)570-2369

▶산에서 채취한 산나물과 맑은 물에서 잡아올린 민물고기가 정선 먹거리의 주종을 이룬다. 동굴지구의 향토음식점(033-562-7062)에서는 산채백반, 올챙이국수, 감자송편 등을 먹을 수 있다. 동면 할머니횟집(033-562-0559)은 송어비빔밥, 향어백숙 등 다른 지역에서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음식을 내놓는다.

■주변 명소/화암동굴·약수… "소금강" 들러보세요

아름다운 산골 정선, 그 중에서도 민둥산이 있는 남면과 화암관광지가 있는 동면 사이가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꼽힌다. 정선 소금강이라 불리는 지역이다. 민둥산에 올랐다면 이 곳을 지나칠 수 없다. 화암(畵岩)은 이름 그대로 그림 같은 바위로 둘러쳐진 곳. 화암8경으로 구분하고 있다. 꼭 들러봐야 할 곳이 화암동굴과 화암약수다.

화암동굴은 원래 금광이었다. 금광의 갱도를 파고 들어가다 석회암 동굴을 발견했다. 지금은 금광과 석회암 동굴을 아울러 '금과 대자연의 만남'이라는 주제의 테마동굴로 일반에 개방되고 있다. 관람코스는 1,803m. 절반은 금 박물관, 나머지 절반은 석회암 절경지대다.

관람은 폐광의 갱도에서 시작된다. 처음 만나는 곳은 '역사의장.' 금광의 당시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밀납으로 광부들을 만들어 금을 캐는 작업을 설명한다. 재현 부스는 모두 16개. 관람객이 부스 앞에 서면 센서가 작동해 광부들이 움직이고 1분 내외의 해설이 곁들여진다. 밀납인형이 정교하다. 이어서 '동화의 나라'와 '금의 세계.' 도깨비를 형상화한 화암동굴의 캐릭터 금깨비와 은깨비가 안내하는 이 곳은 금의 형성과 발견, 채광과 제련 등 금에 대한 모든 것을 동화적으로 설명하는 장소이다.

마지막으로 만나는 것이 동굴의 하이라이트인 천연동굴이다. 이 곳에는 동양 최대 규모로 알려진 유석폭포를 비롯해 대형 석주와 석순이 수없이 많다. 계단으로 만들어진 550m의 탐방로를 따라 구경한다. 아직도 석회석을 머금은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어 종유석과 석순이 자라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화암약수는 1910년 발견된 약수. 탄산이온, 철분, 불소 등이 함유돼 있다. 시원하면서 계피가루를 탄 듯한 씁쓸한 맛이 이색적이다. 위장병, 피부병, 빈혈, 안질 등에 효험이 있다고 한다. 약수터 입구 절벽에 거북바위가 있다. 남쪽을 향해 기어가는 듯한 모습이다. 가을이면 단풍과 조화를 이룬다.

화암8경은 아니지만 동면의 명물인 화암소나무도 찾아봄직하다. 긴 가지를 한 방향으로 뻗고 있는 화암소나무는 수령이 1,400년이 넘은 것으로 추정된다. 마을의 수호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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