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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신화](21)건국 영웅의 조력자, 이윤(伊尹)과 강태공(姜太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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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신화](21)건국 영웅의 조력자, 이윤(伊尹)과 강태공(姜太公)

입력
2002.09.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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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에게는 훌륭한 조력자가 있게 마련이다. 특히 건국 영웅에게는 어진 신하 곧 현신(賢臣)이 있었다.탕왕(湯王)이 하(夏)의 폭군 걸(桀)을 정벌하고 은(殷)을 세우는 데에 가장 공로가 컸던 현신은 이윤(伊尹)이다. 이윤의 탄생에 대해서는 신기한 이야기가 전해내려 온다.

옛날 유신씨(有莘氏)가 다스리던 나라에 한 여인이 이수(伊水)의 강가에 살고 있었다. 그녀는 임신을 하였는데 어느 날 꿈속에서 신이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절구에서 물이 솟아 나오면 동쪽으로 달아나거라. 결코 뒤를 돌아다보아서는 안된다"라고. 이튿날 절구를 보았더니 과연 물이 솟아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이웃 사람들에게 신이 한 말을 알려주고 동쪽으로 10리쯤 도망갔다. 그런데 그녀는 마을이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한 생각이 들어서 고개를 돌려 마을을 바라보았다. 마을은 온통 물에 잠겨 있었다. 그 순간 그녀의 몸은 속 빈 뽕나무로 변하였다. 얼마 후 어떤 여인이 그곳에 뽕잎을 따러 갔다가 뽕나무 안에서 울고 있는 갓난아기를 발견하였다. 그녀는 아기를 임금께 바쳤고 임금은 대궐 주방의 요리사로 하여금 그 아기를 기르게 하였다. 아기는 발견된 곳이 이수 근처였기 때문에 이윤이라고 이름 지어졌다.

대궐 요리사에 의해 길러진 이윤은 요리 솜씨도 훌륭하지만 학문이 뛰어난 젊은이로 성장했다. 그는 은의 탕왕이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탕왕을 위해 일하고 싶었으나 은으로 갈 구실이 없었다. 때마침 유신씨의 딸이 탕왕의 비(妃)로 간택되었다. 이윤은 공주를 수행하는 요리사가 되어 은으로 가게 되었다. 은의 궁정에서 맛있는 요리로 주목을 끌게 된 이윤은 마침내 탕왕의 눈에 띄었다. 탕왕이 요리에 대해 물어보자 그는 거침없이 대답할 뿐만 아니라 요리의 이치로서 정치의 도리까지 설명하니 탕왕은 이윤의 인물됨에 감탄했다. 하지만 이윤은 이 때 탕왕에 의해 즉각 중용된 것이 아니었다. '한비자(韓非子)' '사기(史記)' 등의 기록에 의하면 웬일인지 탕왕은 그의 정견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고 이에 실망한 이윤은 탕왕을 떠나 하의 걸왕에게 가서 한동안 벼슬을 살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걸왕의 폭정을 목격한 후 이윤은 역시 의지할 만한 임금은 탕왕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고 다시 탕왕에게로 돌아온다. 이후 이윤은 재상으로 등용되어 걸왕을 정벌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주문왕(周文王)에 의해 재상에 발탁된 뒤 주무왕(周武王)의 곁에서 은의 주왕(紂王)을 정벌하는 데에 큰 공을 세운 이는 강태공(姜太公)이다. 강태공은 그의 조상이 우(禹) 임금 때 치수에 공이 있어 여(呂) 땅에 봉해졌기 때문에 여상(呂尙) 또는 여망(呂望)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강태공은 노년에 이르기까지 학문에 정진하였으나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아내는 품팔이를 해서 글공부만 하는 무능한 강태공을 먹여 살렸다. 강태공이 여든 살 가까이 된 어느 날 아내는 일을 나가면서 이렇게 당부했다. "비가 올 것 같으니 혹시 비가 오면 저기 멍석에 널어 놓은 보리가 젖지 않도록 들여놓으시구려"라고. 강태공은 방 안에서 글을 읽으면서 건성으로 그러마고 대답했다. 그런데 대낮에 소나기가 한 차례 지나갔다. 저녁 때 아내가 일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멍석에 널어놓은 보리는 다 떠내려갔고 강태공은 그것도 모르고 여전히 방 안에서 글만 읽고 있지 않은가? 부아가 치민 아내는 그 길로 이혼을 선언하고 방문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강태공은 그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어허, 조금만 참으면 될 것을. 80이 되면 운이 트이는데 그걸 못 참고 떠나가다니"라고. 혼자 된 강태공은 위수(渭水)의 강가로 집을 옮겨 반계(蟠溪)라는 곳에서 매일 낚시를 한다고 앉아 있었다. 이 때 그는 미끼를 끼우지 않은 곧은 낚시를 물에 드리웠다 한다. 물고기를 잡으려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임금을 찾아 등용되는 데에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 주문왕은 천제가 나타나 현인을 보내 줄 것을 약속하는 꿈을 꾸고 사방으로 현인을 찾고 있었다. 현인이 잘 찾아지지 않자 점을 쳐 보았더니 위수 근처로 사냥을 나가면 현인을 찾을 것이라는 점괘를 얻었다. 마침내 그는 위수로 행차하여 반계에서 강태공을 만나게 되고 수레에 태워 대궐로 데려오게 된다. 이 때 강태공의 나이가 여든 살이었다고 한다.

태공은 주문왕의 재상이 되어 우선 주의 내실을 굳건히 다졌다. 그리고 주무왕이 즉위하자 지체하지 않고 폭군 주왕 정벌의 군사를 일으켰다. 명(明) 나라 때에 지어진 소설 '봉신연의(封神演義)'는 이 전쟁에서 강태공이 신통한 도술로 은의 장군과 신들을 굴복시켜 마침내 주의 승리로 이끌었다고 전한다. 어쨌든 강태공은 은을 멸망시키는 데에 가장 큰 공을 세워 제(齊) 나라의 임금에 봉해진다.

이 무렵 막노동꾼과 재혼해서 어렵게 살고 있던 전처는 강태공을 찾아가 잘못을 뉘우치며 다시 합쳐지기를 간청했다 한다. 그때 강태공은 그릇의 물을 땅에 쏟은 다음 다시 주워담으라고 시켰다. 그녀는 손이 터지도록 물을 긁어 모았으나 주워 담을 수 없었다. 강태공은 그녀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한다. "우리 사이도 이처럼 다시 합쳐지기는 어렵소"라고. 강태공의 전처는 후회와 수치심으로 그날 밤 목을 매어 자살했다고 한다. "한번 엎질러진 물,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는 속담은 이 이야기에서 유래했다. 이런 이야기는 중국에서 여성의 재혼을 금지하고 정절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더욱 권장된 설화였을 것이다.

소설 '봉신연의' 덕분에 강태공은 인기인이 되었다. 그는 지혜롭고 도술이 뛰어난 인물의 전형으로 중국 민중들의 마음 속에 각인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입춘 날이면 집집마다 대문에 '강태공재차(姜太公在此)'라는 글귀를 써 붙여 귀신이나 사악한 기운을 쫓아 내려는 풍습이 있었다고 이능화(李能和)의 '조선도교사(朝鮮道敎史)'는 전한다.

적극적으로 왕조의 건설에 참여한 현신 그룹의 반대편에는 소극적인 처세관을 지닌 은자 그룹도 있다. 요 임금 때에 왕위를 물려받기를 거절했던 허유(許由) 소부(巢父), 탕왕 때 왕위 계승의 제의를 받고 모욕감에 투신자살한 무광(務光), 주무왕 때에는 은 정벌을 무도한 짓이라고 규탄하다 수양산(首陽山)에서 굶어 죽은 백이(伯夷) 숙제(叔齊) 형제가 있다. 표면상 이들은 건국 영웅의 적대자인 듯 싶지만 역설적으로 성군의 시대를 완벽하게 미화한다는 측면에서 조력자인 셈이다.

건국 영웅의 조력자들에 대한 신화는 나름대로 유형을 형성하여 후세에 계승된다. 소위 임금을 보좌한 유능한 책사(策士)들에 대한 이야기로 한고조(漢高祖)의 장량(張良), 유비(劉備)의 제갈량(諸葛亮) 이야기 등이 이윤, 강태공 신화의 맥락을 잇는다. 결국 망국의 군주가 요녀(妖女)와 짝을 이루듯이 건국의 영웅은 현신과 짝을 이룬다. 이렇게 볼 때 이윤, 강태공 신화도 당시의 신흥 왕조를 정당화시키려는 목적에서 얼마간 의도되고 계획된 설화 구성의 산물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글 정재서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그림 서용선 서울대 서양화과 교수

● 장자못 전설

이윤 탄생 신화에는 세계 각지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두 가지 모티프가 있다. 하나는 홍수에 의해 인간이 멸망 상태에 이르고 남매 혹은 한 가족만이 살아 남아 인류의 명맥을 잇는다는 홍수 신화 모티프이다. 또 한가지는 "…하지 말라"는 금지를 어길 경우 파멸을 맞는다는 금지 모티프이다. 우리나라에도 이와 비슷한 장자못 전설이 있다.

옛날 어떤 마을에 큰 부자가 살았는데 욕심 많고 몹시 인색하였다. 어느 날 중이 와서 동냥을 하였는데 부자는 시주는커녕 쪽박을 깨고 바랑에 똥을 퍼담아 내쫓았다. 보다 못한 며느리가 몰래 나가 쌀을 주었더니 중은 이렇게 말하였다. "며칠 후 앞산 돌 미륵 눈에서 피눈물이 나거든 무조건 산으로 도망가시오. 결코 뒤를 돌아다보아서는 아니되오"라고. 며느리는 이 사실을 마을 사람들에게 말해 주었으나 비웃기만 하고 아무도 믿질 않았다. 며칠 후 과연 돌미륵의 눈이 붉어지자 며느리는 황급히 산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집이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하여 뒤를 돌아다보았다. 마을은 어마어마한 물이 밀어닥쳐 커다란 못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 순간 그녀도 몸이 굳어지더니 뒤돌아 본 모습 그대로 돌로 변해 버렸다. 부자가 살던 그 마을은 큰 못으로 변하여 이후 장자못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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