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2'(우리교육 발행)가 출간됐다. TV 프로그램에 소개돼 시인 신경림(67)씨의 이름을 널리 알린 책의 속편이다. 1998년 펴냈던 전편이 작고 시인을 다룬 데 비해 속편은 생존 시인들의 시세계를 소개했다. 신씨가 시인들을 직접 만나서 나눈 이야기에다 그들과 함께 울고 웃던 기억이 받쳐졌으니, '시인을 찾아서'라는 제목은 전편보다도 썩 잘 어울리는 셈이다.신씨는 경기 일산의 오피스텔에서 김지하씨와 도란도란 얘기를 했고, 전주 근교 산골 농가에서 안도현씨와 나란히 앉아 차를 마셨다. 고(故) 서정주와 만나기로 약속했지만 끝내 취재할 수 없었고, 조태일은 취재 중에 유명을 달리했다. 이렇게 신씨가 찾은 시인 23명 중에는 그 이름이 낯설지만 그 작품의 울림이 누구 못지않게 큰 이들도 있다. 모두 저자가 다리품을 팔아 우리 땅 곳곳을 다니면서 찾아낸 소중한 사람들이다. 시인들의 시와 신경림씨의 글을 찬찬히 읽다 보면 하나의 큰 뿌리를 발견하게 된다. 그 뿌리는 신씨 자신이 소박하고 진솔한 목소리로 말한 것이기도 하다. "시가 감동을 주는 것은 그것이 삶에 깊이 뿌리박고 있기 때문으로서, 삶과 동떨어진 시는 결코 감동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씨가 찾아간 시인의 삶과 시가 그러했다. 가혹한 시대를 체험하지 않았을지라도 이 시인들의 시를 만나면 서늘하고 아프다. 가령 김지하씨의 시 '1974년 1월'이 그렇다. '1974년 1월을 죽음이라 부르자/ 오후의 거리, 방송을 듣고 사라지던/ 네 눈 속의 빛을 죽음이라 부르자/ 좁고 추운 네 가슴에 얼어붙은 피가 터져/ 따스하게 이제 막 흐르기 시작하던/ 그 시간/ 다시 쳐 온 눈보라를 죽음이라 부르자' 1974년 1월은 아무도 유신헌법을 비판할 수 없으며 비판했다는 사실을 퍼뜨려서도 안되며 이를 어길 시에는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농담 같은' 긴급조치가 공포된 달이다.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때 신경림씨는 "온몸이 떨렸고 손이 굳어 펜을 잡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조태일 시인도 흥분해서 면도를 하다가 살갗을 베었다"고 했다. 시는, 얼마나 삶을 치열하게 살고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속일 수 없는 답변이다. 시와 삶의 틈새가 좁혀질수록 진실에 가까운 것이 된다.
줄곧 장바닥에서 뒹굴면서도 당차고 새된 시를 쓴 민영씨를 두고 신경림씨가 풀어놓는 이야기도 큰 뿌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민씨는 어물가게 점원, 땅콩장수, 조판공, 사식집 일을 했다. 그런 그가 쓴 시는 질퍽하고 끈끈한 것이 아니라 청결하고 매섭다. '한 늙은이의/ 더러운 욕망이/ 저토록 많은 꽃봉오리를/ 짓밟은 줄은 몰랐다.'('수유리 하나') 세속적 삶을 부지런히 영위하면서 세속화하지 않는 시를 쓰는 민씨의 작업은 언뜻 시와 삶의 간극이 넓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신씨의 설명처럼 "생활에 철저함으로써 오히려 더 시를 치열하게 쓸 수 있었고 거꾸로 그것이 그를 세속화하는 데서 지켜주었던 것이 아닐까?"
신경림씨 자신이 시와 삶을 단단하게 엮는 작업을 해온 시인이다. 그의 모서리는 둥글어진 것 같다. 그가 만난 시인들의 최근 시작(詩作)이 느슨해졌다는 평가에 대해 그는 시인들의 변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그러나 "시의 아름다움은 삶에 뿌리박은 데서 온다"는 그의 믿음은 여전히 굳다. 현대적인 실험성이 가득한 황명걸씨의 'SEVEN DAYS IN A WEEK'를 두고 신경림씨는 황씨의 시 '한국의 아이'가 있어 더 좋은 작품이라고 평한다. '장난감이 없어 보채는 아이야/ 보채다 돌멩이를 갖고 노는 아이야/ 네 어미는 젖이 모자랐단다/ 네 아비는 벌이가 시원치 않았단다'('한국의 아이'에서)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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