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후보가 미국에도 가보고 한·미 교류사에 대해 여러모로 연구도 해 보고, 우리나라의 역사와 현실, 세계사와 국제관계, 그리고 인간 심리를 깊이 연구할 충분한 기간을 가진 후에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했으면 한다."고려대 영문학과 서지문 교수가 최근에 쓴 어느 칼럼에서 한 말이다. 서 교수의 주문대로 그렇게 많은 걸 이제부터 연구하려면 3개월 가지곤 어림도 없을 터인즉, 서 교수는 사실상 노 후보가 지금으로선 대통령이 될 자격이 없다는 자신의 생각을 밝힌 셈이다.
이 민감한 선거철에 특정 후보의 자격을 정면으로 문제삼은 서 교수의 용기(?)는 놀라운 것이긴 하지만, 서 교수가 그런 결론에 이르게 된 과정은 좀 황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서 교수는 지난 2월 "노 후보에게 지대한 호감을 가졌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달라졌을까? 노 후보의 "여러 정치적 견해가 투박하게 감정적인 것"이 주된 이유라고 한다. 그래서 "반미주의자면 또 어떤가"라는 노 후보의 최근 발언이 서 교수로 하여금 그 문제의 칼럼을 쓰게 한 것이다.
서 교수는 미국을 숭배하는 숭미주의자인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 교수는 "다음 대통령이 이지적이고 냉철한 반미주의자라면 자신의 반미(反美) 성향을 지렛대로 이용해 미국으로부터 많은 양보와 실리를 이끌어낼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을 것이다.
서 교수는 말을 투박하게 감정적으로 하는 것에 강한 혐오감을 갖고 있는 듯 하다. 서 교수의 이런 혐오감은 지난해 4월 그의 유명한 도올 김용옥 비판에서 유감없이 발휘된 바 있다. 그런데 몹시 의아한 것은 서 교수가 자신의 도올 비판이야말로 말을 투박하게 감정적으로 한 것이었다는 점을 왜 깨닫지 못하는가 하는 것이다.
나는 당시 서 교수의 투박하고 감정적인 도올 비판에 동의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 교수의 이성과 지성을 의심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단지 서 교수의 도올에 대한 문제의식이 그만큼 강하다고 느꼈을 뿐이다.
노 후보의 "반미주의자면 어떤가"라는 말은 노 후보가 미국에 가본 적이 없다는 걸 '반미주의'로 연결시키려는, 치졸한 수준의 공격이 계속되는 것에 대한 강한 반박이 아닌가. 게다가 노 후보의 그런 어법은 지난 2월 이후 갑자기 생겨난 것도 아니다. 서 교수의 '지대한 호감'이 '지대한 반감'으로 바뀐 건 서 교수의 정치관이 그만큼 투박하고 감정적이라는 걸 말해주는 게 아닐까?
서 교수가 역지사지(易地思之)를 전혀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감성적 접근에 대해서만 그렇게 강한 편견을 드러낸다는 건 도무지 납득하기 어렵다. 투박하고 감정적인 어법에도 그 나름의 장점이 있기에 서 교수의 그런 면을 부정적으로만 볼 건 아니지만, 반드시 최소한의 역지사지만큼은 전제되어야 하리라 믿는다.
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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