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발명가'로 널리 알려진 이지밸브의 김예애(72) 사장은 "장기목표를 세우는 것이야말로 노년을 활기차게 살아가는 확실한 비결"이라고 귀띔한다. 그의 장기목표는 80세가 되기 전에 자신의 발명품인 페달형 수도밸브를 보급하고 100세부터는 여성기업인이 되려는 젊은 여성들의 자문역할을 하는것이다. 젊은 시절 교사, 신문사 광고국 직원, 자수공장 사장으로 다채롭게 살아온 그는 '정년 이후에는 쉬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사람을 늙게 만든다고 말한다.
나는 늘 농담처럼 "염라대왕이 부르면 '잠깐만 기다리라'고 할 것"이라고 말한다. 지금 하는 일을 끝내기 전까지는 저승으로 갈 수 없으니 몸이 아파서도 안되고, 일찍 죽어서도 안된다는 뜻이다. 내 또래의 여자들이 일찌감치 할머니가 되는 것은 하는 일이 없거나, 하고 싶어도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발명이라는 엉뚱한 일을 시작한 것은 1997년, 67세가 되던 때였다. 60세가 될 때까지 나는 30년간 자수공장을 운영했다. 직원 10여명과 함께 직접 자수를 놓아 작품을 만들었던 자수공장은 제법 돈벌이가 됐다. 내 작품이 청와대에도 들어갔고 자수작가 김의정(예명)으로도 꽤 알려졌다. 그러나 중국에서 값싼 자수가 들어오면서 도저히 경쟁을 할 수가 없어 결국 문을 닫았다. 이후 65세가 될 때까지 5년간 할 일 없이 지내면서 시름시름 앓았다.
하지만 '이대로 죽는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 돌연 중국여행을 결심하고 대학생 대상의 배낭여행을 신청했다. 한달 동안 10개 도시를 돌아보는 여정이 얼마나 힘들었던지, 돌아온 뒤 15일간 앓아 누웠을 정도다.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자 이제는 '할머니의 배낭여행기'를 책으로 써야겠다는 욕심이 생겨, 우선 문서작성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컴퓨터에 재미를 붙이게 됐고 내친 김에 인터넷까지 배우게 됐다. 하이텔의 발명가 동호회를 기웃거리면서 평소의 아이디어를 구체화시키는 방법을 찾게 됐다.
발명이란 대단한 일은 아니다. 다만 생활하는 가운데 불편한 것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편리하게 바꿀 수 있을까' 하고 끊임없이 생각하다 보면 아이디어가 샘솟는다.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에 의문을 갖고 새롭게 바라보는 '발상의 전환'이 바로 발명의 원동력인 것이다. 발로 조절하는 페달형 수도밸브를 발명한 것도 평소 우리나라 여성들이 손놀림이 바쁘다 보니 물을 틀어넣고 설거지를 하는 데 의문을 갖게 되면서였다. 손 대신 발로 물을 잠그면 물 낭비를 막을 수 있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던 것이다.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해 1년 이상 을지로 공구상을 헤집고 다녔고 노점의 수도수리공, 대학교수 등을 찾아다녔다. 결국 3년 만에 시제품을 만들어 냈으나 사업자금이 떨어져 아직은 제품화하는데 난관을 겪고 있다. 현재 새로 짓는 아파트나 주택에 보급하기 위해 건설업자들을 열심히 만나고 있으니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이밖에 핸드폰 줄을 상단대신 하단에 부착하는 아이디어로 실용신안 특허를 받았다.
보람도 있었다. 페달형 수도밸브를 99년 코엑스에서 열린 여성기업인박람회에 출품해 좋은 평가를 받았고 여성발명가협회 공모전에서 장려상을 받기도 했다. 2000년에는 페달형 수도밸브를 보급하기 위해 직원 3명을 데리고 벤처기업 이지밸브를 세웠다. 아들이 경영학 교수이지만 내 스스로 관련 법규를 일일이 찾아보고 직접 벤처기업 인증을 따냈다.
나는 서울지방중소기업청이 인증한 벤처기업인 가운데 최고령자이다. 모두들 나를 만나면 나이를 믿지 않으며 젊게 사는 비결이 뭐냐고 묻는다. 나는 '정년퇴직을 하면 더 이상 새로운 것을 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이 사람을 나이먹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가족들이 나이든 부모에게 "이젠 쉬세요" "하던 일을 그만 하세요"라고 하는 것이야 말로 죽음을 재촉하는 지름길이다. 내가 70세에 운전면허증을 따겠다고 했을 때 가족이나 직원들이 모두 말렸다. 심지어 운전면허시험장의 감독관들도 위험하니 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권할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단번에 필기시험에 붙었을 뿐 아니라 젊은 사람들도 여러 번 떨어진다는 실기시험까지 한번에 합격해 주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죽기 전에 뭔가 보람있는 일을 해야 겠다는 생각 또한 내 노년을 바쁘게 하는 원동력이다.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홈스테이를 시작한 것은 또 한번 나를 채찍질한 결과다. 혼자 살기 때문에 방도 남고 일어를 잘하기도 했지만, 한국을 찾는 일본인에게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알려주자는 취지가 나를 움직이게 했다. 일년에 우리 집을 찾는 일본인은 30여명. 그 가운데는 교사나 문화인등 한일관계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도 많다. 이래서 만들어진 것이 한일문화교류협회이고 내가 회장직을 맡게 됐다.
우리는 늘 아이디어속에서 산다. 하지만 그 아이디어를 그냥 떠내려 가게 내버려 둘 것이 아니라 우리 생활을 바꾸는 것으로 붙잡아 두어야 한다. 새로운 생각과 행동은 젊은 사람만의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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