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안정법 보류에 따라 여야간에 화해 분위기가 조성됐으나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다. 1985년 말의 정기국회에서 여야는 다시 격돌했다. 조세감면규제법 때문이었다.당시 조세감면규제법은 재벌에 지나친 혜택을 주는 내용이어서 국민의 반발이 컸다. 이 때문에 선명성을 중시한 신민당은 법안의 심의 자체를 거부하는 초강경 태세를 취했다. 나 역시 이 법에 많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다만 야당으로서도 반대만이 능사가 아니라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국민당이 줄곧 주장해 온 대로 농민과 중소기업에도 혜택이 돌아가는 내용의 수정안을 만들었다.
그러나 민정당은 12월2일 국민당의 수정안 가운데 극히 일부만을 집어 넣은 법안을 민정당 의원들끼리 모여 재무위에서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농성 같은 극한 투쟁보다는 정책 대결을 주장해 온 국민당이었지만 힘으로 밀어 붙이는 민정당의 편협한 태도를 용납할 수는 없었다. 날치기는 그 때나 지금이나 나로서는 도저히 받아 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국민당은 곧바로 신민당과 함께 본회의장 농성에 들어 갔다. 국민당이 신민당과 함께 농성을 시작하자 민정당은 비상수단을 취했다. 소속 의원들을 몰래 의사당 146호실로 불러 들여 놓고 문을 잠근 채 본회의를 열어 조감법안은 물론 새해 예산안까지 통과시켜 버렸다. 뒤늦게 이를 안 신민당 의원들이 문을 부수며 저지하려 했지만 이미 상황은 끝난 후였다. 예산안까지 날치기 처리한 민정당은 한 술 더 떠서 문을 부수고 들어 온 신민당 의원들을 의사당 기물 파손과 폭력 등을 이유로 고소하기까지 했다. 정국은 싸늘하게 얼어 붙었다.
해가 바뀌었다. 나는 신민당 이민우(李敏雨) 총재, 민정당 노태우(盧泰愚) 대표와 3당 대표회담을 자주 가졌다. 대화와 타협으로 정국을 풀어 가야 한다는 지론 때문이었다. 대표회담에서 3자는 날치기로 처리한 예산안과 조세감면규제법 문제는 물론, 전두환(全斗煥) 대통령과의 만남에서 내가 꺼냈던 헌법개정특별위원회 구성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대표회담은 큰 성과를 거둘 뻔했다. 날치기로 통과시킨 새해 예산에서 680억원을 삭감해 국민의 조세 부담을 줄이기로 했고, 조세감면규제법을 다음 회기에 개정하기로 합의했다. 헌법개정특별위원회 구성 문제에서도 소득이 있었다. 민정당 노 대표가 '개정'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현행 헌법에 문제가 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며 양보를 요구해 명칭은 '헌법연구특별위원회'로 바뀌었지만 헌법 개정 관련 기구를 국회에 둔다는 데는 3자가 합의했다.
나는 헌법 관련 위원회가 구성된다는 것 자체가 개헌을 전제로 한 것인 만큼 명칭에 구애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자칫 명칭을 고집하다가 기구 구성 자체가 무산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3당 대표회담 합의 직후 문제가 발생했다. 이 총재가 분명히 대표회담에서 합의했지만 '연구'라는 명칭에 대한 신민당 내의 거부감을 이기지 못했다. 결국 대표회담의 다른 합의 사항까지도 없었던 일로 돼 버렸다. 나는 지금도 당시 신민당의 태도가 아쉽기만 하다.
2월 들어 정국은 더욱 꼬였다. 신민당은 12대 총선 첫돌인 12일부터 대통령직선제 개헌 1,000만명 서명 운동을 시작했다. 바야흐로 정국은 개헌 공방 국면으로 전환했다. 신민당은 전국 주요 대도시에서 개헌 추진 대회를 열었고 지식인 결성대회, 헌법개정추진위원회 현판식 등을 통해 개헌 분위기로 몰아 갔다. 국민당은 개헌에는 공감했지만 신민당처럼 가두에 나서지는 않기로 했다. 대화가 우선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정부는 신민당의 개헌 투쟁에 힘으로 맞섰다. 당시 종로구 인의동 동대문경찰서 앞에 있던 신민당사의 출입문을 봉쇄하는 등 물리적으로 개헌 서명운동을 막으려 했다. 힘과 힘이 부딪치면서 정국의 경색은 날로 심해졌다. 2월24일 마침내 청와대에서 대통령과 3당 대표의 영수회담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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