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9월19일부터 이튿날 사이에 한국 독립군과 중국 지린성(吉林省) 자위군의 연합군이 만주 쌍성보(雙城堡)에 주둔하던 일본군과 만주군을 공격해 이 지역을 장악했다. 이것이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한중(韓中) 연대의 모범으로 기록되고 있는 쌍성보 전투다.1931년 9월 만주사변의 결과로 그 이듬해 3월1일 일본의 괴뢰 국가로서 수립된 만주국은 식민지 상태의 조국을 떠나 중국 동북(東北) 지방에 자리잡은 200만 교포의 생활 근거를 위협하고 그 지역의 항일 무장 독립운동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지역에서 활동하던 항일 독립군과 만주국 수립에 반대하는 중국군 사이의 연합전선 형성을 촉진하기도 했다. 1931년 12월 독립군 총사령관 지청천(池靑天)은 지린성 자위군 총지휘관 딩차오(丁超)와 만나 한중 연합전선을 구축할 것에 합의했는데, 이듬해 9월의 쌍성보 전투는 이 합의의 첫번째 실천이었다.
쌍성보는 창춘(長春)-하얼빈(哈爾濱) 철도 중간에 자리잡은 지린·헤이룽장성(黑龍江省)의 요충지였다. 동북 지방 물산의 집산지로서 친일 부호와 고관대작이 많이 사는 지역이어서, 전략적 가치가 매우 높은 곳이었다. 당시 쌍성보에는 만주군 3,000여명과일본군 소수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쌍성보 전투에서 한중 연합군은 30여명의 사상자를 낸 데 비해, 일만(日滿) 연합군 측은 1,000여명의사상자를 내고 나머지 2,000여명이 투항했다. 이 전투에서 한국 독립군이 획득한 무기와 피복·식량은 그 뒤 수 개월동안이나 쓸 수 있는 분량이었다고한다. 쌍성보는 얼마 뒤 일만 연합군이 다시 장악했다가 그 해 11월17일 한중 연합군이 되찾았으나(제2차 쌍성보 전투), 폭격기까지 동원한 일만군측의 공격으로 결국 적에게 넘어갔다.
고종석 /편집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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