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보통명사가 된 '문민정치'라는 말은 내가 맨 처음 썼다. 민(民)이 중심이 되는 정치라는 뜻이었다. 1984년 2월29일 121회 임시국회에서 나는 다시 국민당 대표연설을 했는데 이 때 처음으로 문민정치라는 단어를 사용했다."…이 나라에 참다운 도덕적 민주정치가 이룩되기 위해서는 첫째, 문민정치를 확립해야 합니다. 다시는 이 땅에 무력에 의한 정치적 악순환이 없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힘에 의한 정치는 결과적으로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국가적인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의 대표연설 이후 문민정치라는 단어는 신문 지상에 자주 자주 쓰이기 시작했다. 당시 영자신문은 이를 'civilian controlled politics'로 표현했다.
1984년 중반부터는 신당 창당 움직임이 꿈틀댔다. 5월18일 광주민주화운동 4주년과 김영삼(金泳三)씨의 단식 1주기 날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가 결성됐다. 신당 탄생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민추협은 7월 들어서는 도별로 지부를 설치하는 등 꾸준히 조직을 확대했다. 11월30일에는 정치활동 피규제 대상으로 남아있던 99명 중 김영삼, 김대중(金大中)씨를 빼고는 주요 야당 인사 84명이 해금됐다. 이는 민추협의 신당 결성 및 선거 참여에 촉매제가 됐다.
제도권 정치에 몸 담고 있던 나는 민추협의 취지에 적극 공감했고, 민추협의 민주화 노력을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이들이 현실 정치 속에 들어와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함께 싸워나가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이미 11대 국회 초반 국민당 대표연설에서 "정치 규제를 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나의 이력서 44회 참조)
민추협이 모태였던 신민당은 1985년 1월18일 선거를 불과 20여일 앞두고 발족했다. 그리고 2월12일에는 제12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다. 신민당의 바람은 거셌다. 대구 중·서구에 국민당으로 출마한 나는 당초 1등을 자신했다. 그래서 신민당 유성환(兪成煥) 후보를 지원하기까지 했다. 유세장에서도 나는 유성환 후보를 한껏 추켜 세우며 여당 후보를 찍지 말고 나와 유 후보 두 사람을 국회에 보내달라고 연설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민당 돌풍은 내 예상보다 훨씬 강력했다. 유 후보가 1등, 내가 2등이 된 것이다. 유 의원은 선거 과정에서 내가 보여 준 호의를 두고두고 고마워했다.
선거 최종 결과는 민정당이 148석, 신민당이 67석, 민한당이 35석, 국민당이 20석 이었다. 그러나 민한당의 경우 대부분 신민당으로 입당해 신민당은 더 강력한 제1야당이 됐고, 민한당은 원내교섭단체도 되지못하는 제3야당으로 전락했다.
총선 후 국민당은 곧바로 전당대회를 열어 전열을 정비했다. 나는 또 한번 총재 출마를 결심했다. 11대 때처럼 당국의 압력으로 중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굳게 마음 먹었다. 당 분위기도 나의 총재 선출을 바라는 쪽이었다. 총선을 치르면서 당 이미지를 쇄신할 필요성을 모두가 느꼈기 때문이다.
총재 선출은 경선으로 치러졌다. 12대 때 영입한 경남 남해 출신의 최치환(崔致煥) 의원이 출마를 했기 때문이다. 나는 단독 출마 보다는 경선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3월22일 국민당 전당대회에서 총재 경선이 실시됐다. 대의원 1,050명 가운데 710명의 대의원이 투표, 내가 456표를 얻었고 최 의원이 246표를 받았다. 대의원 절반인 525명의 표를 얻어야 하는 당헌에 따라 결선 투표에 들어가야 했지만 최 의원이 중도에 사퇴했다.
나는 총재 취임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국민당 당원 여러분의 뜻으로 총재에 선출된 데 대해 무거운 책임감을 느낍니다. 우리가 이번 전당대회에서 당헌에 따라 민주적인 방법으로 다른 정당과는 달리 정정당당하게 경선에 의해 총재를 선출했다는 사실은 우리당의 훌륭한 정치력을 과시한 결과인 것입니다."
당원들의 환호성은 대단했다. 사실 이날 대회는 5공화국 수립이후 야당 총재를 직접 경선으로 뽑은 효시였다. 주요 일간지들은 이를 1면 톱으로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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