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김정일(金正日) 북한 국방위원장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간 역사적인 북일 정상회담이 진행된 시간은 2시간 30분. 그러나 양국 정상은 이 짧은 시간에 지난 세기 양국 관계를 '가깝고도 먼 나라'로 옭아맸던 난제들을 상당부분 풀어냈다. 일본은 과거 청산과 경제 협력을, 북한은 납치문제와 무기위협 해소의 선물 보따리를 협상 테이블에 내놓으면서 양국은 국교정상화라는 대명제에 한발 다가섰다.▶과거 청산과 사과
북한의 입장에서 일제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와 배상문제는 국교정상화로 가는 제1의 전제조건이었다. 이 문제를 놓고 북한은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당시의 과거 청산방식이라는 차선책을 택했다.
북한은 1945년 8월 15일 이전의 재산청구권을 상호 포기하는 대신 일본이 이른바 '경제협력'이라는 보상방식으로 북한을 지원한다는 합의내용에 서명했다. 지금껏 북한이 주장해 온 배상방식의 과거 청산을 포기한 셈이다.
초점은 경제협력의 형식과 자금규모에 쏠리고 있다. 일본은 국교정상화 이후 적절한 시기에 무상자금 협력 저금리 장기차관 제공 국제기관을 통한 인도적 지원 등의 대북 경제협력을 실시할 것을 평양선언에 못박았다.
경제협력의 자금규모에 대해서는 한일 청구권 협정을 계기로 일본이 한국에 제공한 5억 달러(무상 3억, 유상 2억)를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100억 달러에 달한다는 추산도 있다. 이를 근거로 북한은 130억 달러 이상을 일본에 비공식 요구했다는 보도도 나오고 있다.
과거사 사죄문제는 평양선언에서 일본측이 95년 '무라야마 담화'수준을 답습하는 선에서 매듭을 지었다. 선언은 "조선의 여러분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준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여 통절한 반성과 마음 속으로부터의 사과를 표명한다"고 밝혔다.
▶안전보장
일본으로서는 일본 열도 전체를 사정거리 안에 두는 미사일의 존재가 현존하는 가장 큰 안보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일본은 1998년 8월 북한이 일본 상공을 통과하는 대포동 미사일 발사실험을 강행하자 이에 맞서 군사력을 강화해 왔다.
고이즈미 총리는 김 위원장으로부터 북한이 2003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미사일 발사실험을 동결(모라토리엄)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같은 합의에는 북미관계 개선을 노리는 북한의 메시지가 담겨져 있다. 북한은 12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미일 정상회담에서 핵과 미사일 문제에 대해 안이한 타협을 하지 말도록 고이즈미 총리에게 특별 주문한 사실을 잊지 않고 있다.
평양선언에 '국제합의를 준수한다'는 대목이 들어간 점도 눈길을 끈다. 이를 두고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사찰에 응하겠다는 뜻이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납치의혹
일본인 납치문제를 고이즈미 방북의 성패를 가름할 최대 관심 사안으로 촉각을 곤두세워왔던 일본은 뜻밖의 결과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북한이 고이즈미 총리에게 내놓은 명단에는 총 8건 11명의 피해자 가운데 생존자 4명, 6명 사망, 1명 확인 미상이라는 조사결과가 적혀 있었다.
방북길에 오르는 고이즈미 총리에게 피해자 전원의 안부와 조기 송환의 구호를 외쳤던 피해자 가족들은 "그간 정부는 무얼 했느냐"고 원통함과 분노를 표시하고 있다.
그러나 김 위원장이 납치의혹 자체를 부정하던 종전 태도를 180도 선회해 납치사건을 정식으로 인정한 것은 물론 북한의 절대권자로서는 전례를 찾기 힘든 사과 표현과 재발 방지를 약속한 것은 국민을 납득시킬 만한 방북 성과로 만족할 만하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앞으로 사망자들 사인에 대한 조사, 생존자들의 조속한 귀국, 재발방지대책 등이 양국이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았다.
/이영섭기자 young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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