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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598)스톨리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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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598)스톨리핀

입력
2002.09.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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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9월18일 제정 러시아의 정치가 표트르 스톨리핀이 키예프의 한 극장에서 연극을 관람하다가 암살됐다. 49세였다.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2세의 내무장관 겸 총리를 지낸 스톨리핀은 1905년 혁명('피의일요일' 사건) 이후 러시아가 점진적 자유화의 길로 들어서느냐 공산주의 혁명으로 마감하느냐의 갈림길에서 역사의 키를 쥐고 있던 사람이었다. 스톨리핀은 '피의 일요일'을 무마하기 위해 니콜라이2세가 10월 선언으로 약속했던 자유주의적 개혁을 대부분 형해화함으로써 러시아 반체제 세력을 급진화의 길로 내몰았다. 혁명 세력으로부터 러시아 제국을 방어할 요량으로 황제의 뜻을 너무 충실히 따르다가, 결국 자신과 황제의 죽음을 재촉하고 제국을 무너뜨린 것이 역사가 그에게 맡긴 얄궂은 역할이었다.농업 부문에서 스톨리핀이 부분적으로 시도한 자본주의적 개혁에도 불구하고, 역사가들은 그의 정치를 '스톨리핀의 반동'이라고 부른다. 10월 선언으로 시국이 안정되자 스톨리핀은 혁명 세력에 대한 대대적 탄압에 들어가 노동조합을 폐쇄하거나 그 등록을 취소시키고, 반정부적 노동자들과 지식인들을 처형하거나 유배시켰다. 또 10월 선언으로 도입된 두마(의회)를 해산하고 사회민주당 소속 의원들을 시베리아 유형지로 보냈다. 비밀 경찰 조직도 1905년 이전보다 외려 더 강화됐다.

이 모든 반동적 조처 덕분에 스톨리핀은 '목을베는 사나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그 시기의 교수대는 '스톨리핀 넥타이'라고불렸다. 쿨라크(농업자본가) 육성을 핵심으로 한 스톨리핀의 농업 개혁도 일시적으로 혁명 세력의 기를 꺾기는 했지만 러시아에 자본주의를 뿌리내리게 하기에는 힘이 달렸다. 결국 러시아는 마르크스의 예측과 달리 자본주의를 뛰어넘어 공산주의 혁명으로 치달았다.

고종석/편집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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