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때 고향오시는 분들, 명절 내내 일만 하다 갈 각오하세요." 태풍 '루사'의 직격탄을 맞아 100여동 마을가옥 가운데 절반 정도가 전파되거나 반파되는 피해를 입은 강원 강릉시 강동면 임곡1리 고순민(35·高順民) 이장은 "이번 추석은 다른 어느 해보다도 많이 기다려 진다"면서 이렇게 당부했다.고 이장은 강릉시 관내 145명 이장 중 유일한 여자. 피해 조사에서부터 구호품 분배, 복구작업까지 억척스럽게 해내고 있는 고 이장이 추석을 손꼽아 기다리는 이유는 두 가지. 첫째는 "노인들만 사는 동네에 복구 작업을 도울 수 있는 젊은 사람들이 많이 들어올 것 같기 때문"이고, 둘째는 "수해 나고 얼굴만 한 번 본 남편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란다. 고 이장은 "요즈음 나는 동네일 보느라고, 새마을지도자인 남편은 도로복구작업 하느라고 바빠 지나다 우연히 한번 마주친 적이 있을 뿐"이라며 "그래도 추석날 한나절은 남편과 차례도 지내면서 보낼 수 있지 않겠느냐"고 웃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실제로는 이번 수해로 집과 전답까지 몽땅 잃어버린 고 이장 부부가 오붓하게 추석을 보낼 곳은 없다. 고 이장은 면사무소 한켠에 매트리스를 깔아 잠을 자고 있고, 남편은 복구공사현장 컨테이너에서 지내고 있다. 더구나 다른 피해가구에는 전부 컨테이너를 나눠주고 내부작업까지 마쳐 추석을 보낼 수 있도록 해주었지만 정작 자신들의 거처는 챙기지 못했다.
"나는 이제 임곡리 이장이 아니라 20채가 넘는 컨테이너집들이 들어선 컨테이너리 이장"이라고 농담하던 고 이장은 "하지만 다른 이들에게 신경 쓰느라 집이 반파된 친정 부모님이 계실 곳을 마련해 드리지 못한 게 무엇보다 가슴이 아프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래도 태풍으로 얻은 것도 있단다. 마을에 들어서는 쓰레기 매립장과 이를 둘러싼 보상금 문제로 사분오열 됐던 주민들이 이번 수해로 다시 하나로 똘똘 뭉치게 됐다는 것. 게다가 이번 추석은 마을 주민들을 더욱 끈끈한 이웃으로 만드는 계기가 될 것으로 고 이장은 기대하고 있다.
"컨테이너에 사는 주민들끼리는 추석 준비를 함께 할 생각입니다. 각자 준비를 할 형편이 못되기 때문에 차례는 각자 지내더라도 공동으로 장을 보고 음식 준비도 함께 해야죠. 비록 폐허 위에서 땀 흘리면서 보내게 될 테지만 분위기만은 정이 흐르는 옛 추석을 되찾게 될 겁니다."
고 이장은 그러면서 "여자 이장이라고 깔보던 사람들도 이번 재난을 겪으면서 '독한 여자'라고 괜히 무서운 척하면서도 사실은 다들 고마워해 보람이 크다"며 사람 좋아보이는 환한 웃음을 되찾았다.
/강릉=김기철기자 kim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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