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 저널 '이프' 2002년 가을호에 실린 '특집:여자도 더러워져야 한다'를 재미있게 읽었다. 이 문제로 오랫동안 고민해온 터라 이 특집이 반가웠다. 이 주제가 앞으로 사회 각계에서 활발히 다뤄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내 생각을 좀 말씀드려볼까 한다.여성을 차별하는 사회에서 여자도 남자처럼 '더러워'지지 않으면 성공하기 어렵다. '이프'의 특집은 주로 '인맥 만들기' 중심으로 이 문제를 다루었지만 어찌 인맥 뿐이랴. 권모술수도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지식인들은 대체적으로 '여자이기 때문에 더 깨끗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펴고 있다. 오염된 남성 중심의 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여 남성과 경쟁하는 건 페미니즘의 정신에 반하는 것이며 남성 중심의 문화를 확대 재생산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식이다.
이와 같은 논지는 지역주의 문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지난 수십년간 이루어진 호남 차별을 인정하면서도 영남 지역주의와 호남 지역주의에 대해 양비론을 펴는 사람들이 많다. 왜? 지역주의는 무조건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역주의를 지역주의로 깰 수는 없으며 지역주의 자체를 없애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뒤를 잇는다.
나 역시 그런 식의 주장을 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나를 괴롭히는 한가지 큰 고민이 생겼다. 나는 학벌주의와 연고주의에 대해 강한 비판을 해왔다. 그러나 학벌주의와 연고주의는 하루 아침에 바뀔 수 없는 굳건한 뿌리를 가진 한국의 엄연한 현실이다. 극소수나마 순진한 젊은이들이 내 말을 듣고 자신의 삶에서 학벌주의와 연고주의를 극복하려는 실천을 한다면 그 사람은 생존경쟁에서 매우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다.
원칙과 당위를 역설하는 나같은 사람들은 이미 생존경쟁 체제에서 자기 위치를 굳힌 사람들이다. 즉, 대학교수나 언론인들이 아름다운 원칙을 역설하는 것으로 인해 자신이 손해 볼 일은 전혀 없다는 뜻이다. 오히려 존경까지 누릴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말에 감동해 그 말을 그대로 실천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큰 손해를 입을 수 있다.
나의 고민은 지식인의 책임에 관한 것이다. "내 주장이 현실에서 이루어지건 이루어지지 않건 그건 중요치 않다. 나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원칙만을 역설할 뿐이다"라는 게 많은 지식인들이 갖고 있는 자세일 텐데, 과연 이러한 자세에 문제는 없는가 하는 것이다.
내가 내린 결론은 원칙 및 총론 수준의 '거대 담론'을 역설하는 것만으론 부족하다는 것이다. 실천 및 각론과 연계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나는 여자들도 더러워져야 한다는 대안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 대안을 과도기적 전술로 만들 수 있게끔 '거대 담론'과 연계시키려는 고민이 수반되기를 바란다. 궁극적인 탈출구가 없는 '더러워지기' 경쟁에선 개인은 성공할 수 있어도 약자(弱者) 집단 전체가 성공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강준만/전북대 신방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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