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 공화국 초기에 진정한 의미의 야당은 없었다. 당국은 야당의 각종 정치 행위에 깊숙이 관여했다. 창당 과정에서부터 영향력을 미쳤던 당국은 이를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그랬던 만큼 민한당과 국민당은 '민정당의 제1중대, 제2중대'라는 국민의 매몰찬 비판을 피하기 어려웠다. 그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나는 이런 질책을 겸허하게 받아 들인다.1983년 3월 국민당 전당대회가 있었다. 당시 김종철(金鍾哲) 총재가 원외였기 때문에 당의 원내 대책을 지휘하는 데 적잖은 어려움이 있었다. 원내 뿐만 아니라 원외 위원장들도 다수가 내가 총재를 맡아 주기를 바라는 분위기였다. 의원들은 지지 서명 작업에 나섰다. 25명의 의원 중 당국의 압력에 부담을 느낀 5명을 제외한 20명이 서명했다.
김종철 총재의 유임을 기대하고 있던 당국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곧바로 서명 의원들을 개별적으로 접촉, 압력 반 회유 반으로 지지 철회를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당국의 논리는 이랬다. "이만섭 부총재는 다음에도 기회가 있다. 그러니 이번에는 김종철 총재를 유임시키는 게 좋겠다"
워낙 집요한 당국의 태도에 사업을 하는 일부 의원들과 원외 위원장들이 흔들렸다. 이들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저렇게까지 나오는데 정면으로 맞서 싸울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이번에는 양보하고 넘어 갑시다."
이와 별도로 당시 노신영(盧信永) 안기부장은 개인적 인연을 고리로 나를 설득하려 했다. 노 부장과는 과거 외무부 국장 시절부터 잘 알던 사이였다. 그는 나를 안가로 초대했지만 안기부장의 직위를 이용해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인간적으로 내게 사정을 했다. 그 때문에 내 마음이 상당히 흔들렸다.
결국 나는 총재 경선을 포기했다. 야당 총재 선출 문제까지 간섭하는 당국의 태도에 분노를 느꼈지만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당 전체의 문제였다. 내가 끝내 고집을 부릴 경우 당이 흔들릴 수도 있었다. 당시 정권의 정치 개입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야당은 또 그만큼 정권의 압력에 약했다. 지금 생각하면 비참하기 이를 데 없는 상황이었다.
1983년 4월11일 임시국회가 열렸다. 11대 후반기 첫 국회로 의장단 및 상임위원장을 다시 선출하기 위한 국회였다. 의장단 선거는 보나마나였다. 으레 의장은 집권당에서 나오게 돼 있었으며 2명의 부의장은 집권당과 제1 야당이 1명씩 나눠 갖는 게 관례였다.
임시국회 소집 하루 전날 나는 의장 선거에 나서기로 마음 먹었다. "지금의 국회는 형식적 민주주의의 액세서리 역할 이상이 아니다. 당국이 일일이 간섭을 하고 있지 않는가. 내가 의장 선거에 나서는 것은 당락을 불문하고 출마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11일 본회의 시작 전에 열린 당 의원총회에서 나는 결심을 전격적으로 발표했다. 모두가 놀라는 표정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민정당에서는 긴급회의까지 소집했다. 본회의가 늦춰졌고 민한당 의원들까지 내 출마 사실을 알게 됐다.
투표 결과는 뻔했지만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 당시 국민당 의원은 20명만이 참석했는데 나는 34표를 얻었다. 채문식(蔡汶植) 의원이 223표로 의장에 뽑혔고, 이재형(李載灐) 정래혁(丁來赫) 의원이 2표씩 얻었다. 결국 국민당 의원 외에 민한당과 무소속 등에서 나를 찍은 의원이 14명이 넘었다.
나의 의장 출마를 '현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한 당국은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그날 저녁 갑자기 김종철 총재의 연락이 왔다. 김 총재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당국에서 이번 국회 대표연설에 이 부총재를 내세우지 말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소?" 형식은 상의였지만 내가 물러서기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나는 기분이 상했지만 김 총재를 이해하기로 했다. 김 총재는 한국화약 창업주인 만큼 당국의 압력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116회 국회 국민당 대표연설은 이종성(李鍾聲) 부총재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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