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3 지방선거가 끝난 뒤 어느 날 민주당 최고위원 회의는 민감한 논란을 벌인 적이 있다. 당시엔 표면화하지 않았지만 노무현(盧武鉉) 대통령후보의 정치자금 조달 능력과 관련된 이 논란은 노 후보에 대한 당내 정서를 응축한 것이기도 했다. 그 날 노 후보측은 후보 비서실 요원, 특보단 등 최측근 인사들의 활동비를 당이 지원해 줄 것을 요구했고, 이에 대해 일부 비노·반노 성향의 최고위원들은 강력히 제동을 걸고 나섰다. 양측 사이엔 가시돋친 설전이 벌어졌다. "당에 돈을 갖고 와도 시원치 않은데 경선 때 자기가 데리고 쓰던 사람의 인건비까지 당에서 대라는 말이냐"는 성토가 거세게 나왔다.일부 최고위원들은 "노 후보가 지방을 다닐 때 드는 경비도 모두 당에 손을 벌리고 있다"며 노 후보의 공식적인 대외 활동비까지 문제 삼았다. 물론 "후보특보 등은 사실상 당직자인데 이들에게 활동비를 지급하는 것은 당연하며 노 후보에게 불법적으로 돈을 만들 것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반론도 만만찮게 제기됐다. 이런 갑론을박을 거친 끝에 지금은 의원이 아닌 노 후보 특보 및 비서실 요원 일부가 당으로부터 '최소한의' 활동비를 지급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비단 이 에피소드가 아니라도 노 후보가 돈을 만들 줄 모른다는 사실은 자타가 인정한다.
노 후보는 12월 대선과 관련해 "돈 안 드는 깨끗한 선거를 하겠다"는 점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조한다. 민주당은 앞으로 있을 선거법 개정 협상 과정에서 이러한 노 후보의 뜻이 선거 공영제 확대를 통해 관철될 수 있도록 전력 투구한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당내에서는 "노 후보로서는 '정말' 깨끗한 선거를 치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자포자기성 푸념과 불평도 만만찮게 터져 나온다. 노 후보가 '돈 만드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최대한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데 그런 결핍 상태에서 선거를 제대로 치러낼지 걱정 스럽다는 얘기다.
정치자금과 관련된 문제는 노 후보에게 강점이자, 약점이다. 역대 대선에서 여당이든, 야당이든 1인 보스를 중심으로 천문학적인 음성 정치자금을 만들어 선거에 쏟아 부었던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노 후보의 약점인 측면이 더 부각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이에 대해 노 후보측은 "정경유착과 금권정치 등 구태를 답습하면서 어떻게 정치개혁을 외칠 수 있는가"라고 강하게 반문한다.
그러나 노 후보가 정치자금을 조달하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특단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위기감은 당내에 상당히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재계의 동향에 정통한 A 의원은 최근 노 후보에게 "한나라당과의 협상 과정에서 선거 공영제의 획기적 확대를 확실하게 밀어붙일 것"을 조언했다고 한다. "재계의 분위기가 노 후보에게 우호적이지 않고 또 과거 DJ, YS처럼 막후에서 재계에 손을 벌리는 일도 용이하지 않기 때문에 노 후보가 사는 길은 선거 공영제뿐"이라는 게 A 의원의 주장이다.
노 후보측에서도 이 같은 주장을 상당부분 인정한다. 노 후보의 '살림'을 도맡다시피 했던 실무 측근들은 "우리는 노 후보가 돈을 만들어 분배하는 방식이 아니라 각자가 활동비를 조달, 서로 나눠 쓰는 방식으로 일해왔다"면서 "노 후보가 이런 저런 큰 돈줄을 잡고 막후에서 거래하는 일을 싫어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이 방식에 큰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노 후보측은 그러나 노 후보가 모든 것을 당에 기대고 있다는 주장에 대해선 "그렇지 않다"고 반박한다. 이들은 "대선후보가 된 뒤에도 노 후보가 당 재정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얘기는 사실과 다르다"며 "후보로서 당 후원금 모금에 나름대로 역할을 했고 그 기여 정도는 대선 활동에 드는 경상비를 충당하기에 충분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노 후보가 이제까지는 그럭저럭 대선 활동을 이어 왔지만 앞으로 선거전이 본격화하면 더 많은 사람의, 더 많은 도움이 필요하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노 후보가 직접 돈을 만드는 일을 꺼려왔고 노 후보 진영의 핵심 인사들이 각자 뛴다 해도 1인 당 1년치 모금액이 수 천 만원을 넘지 못했던 사정을 감안하면 더 그렇다. 다른 원외 지구당 위원장에 비해 적은 편은 아니었으나 노 후보가 지구당 위원장 자격으로 지난해 모은 후원금은 2억1,186만원으로 의원들 수준에는 크게 못 미쳤다. 그래서 지난번 국민경선 때 노 후보의 핵심참모 가운데에는 집을 팔아 경선 비용을 댄 인사도 있었고 거의 모든 측근들이 선거자금을 갹출하거나 자기 활동비는 자기가 충당했다. 실제로 노 후보의 자금 줄은 "모교인 부산상고 출신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아주는 것이 있고 자수 성가한 중소기업가 가운데 몇몇이 노 후보에게 호의를 갖고 도와주는 것이 고작"이라는 게 노 후보측의 설명이다.
그러나 앞으로 소요될 대선자금의 규모로 볼 때 이런 방식으로는 어림없다는 것이 민주당 한 인사의 귀띔이다. 노 후보측 사정에 정통한 당의 한 관계자는 "지난 경선 때 정치권 마당발인 김상현(金相賢) 상임고문이 노 후보에게 상당한 도움을 줬다고 하는데 앞으로도 김 고문의 역할이 클 수 있다"고 말했다. 야당시절 정치자금을 주물러 본 김 고문이 '노무현 구하기'에 나설 수도 있다는 뜻이다. 또 "경선이후 노 후보 진영에 합류한 B 의원이 돈을 좀 만들어 보겠다는 뜻을 노 후보에게 전달한 것으로 알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그런데 당내에서 자신을 위해 뛰어줄 대리인을 확보한다는 노 후보의 구상에도 빨간 불이 켜졌다. 당내 경제통으로 꼽히고 크든 작든 자금 조달 능력이 있는 것으로 인정되는 김원길(金元吉) 박상규(朴尙奎) 의원 등이 무소속 정몽준(鄭夢準) 의원 등과의 통합신당을 계속 추진하겠다며 '탈당 불사'를 외치고 나선 것이다. 한화갑(韓和甲) 대표와 가까워 친노 성향으로 분류되던 이들이 왜 노 후보에게 등을 돌리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구구하다. 당내에서는 "김 의원 등이 노 후보를 위해서 정치자금을 모아 보려다 재계의 거부감 등으로 여의치 않자 노 후보로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인지, 아니면 노 후보로는 어렵다는 생각을 먼저 하고 정 의원과의 연대를 타진한 것인지 어느 쪽인지 잘 모르겠다"는 반응이 나온다. 노 후보측이 두 사람의 이탈 조짐에 대해 크게 실망하는 것은 이런 사정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그렇다고 노 후보측이 대선자금 조달에 대해 아주 낭패를 본 것처럼 걱정하는 분위기는 또 아니다. 이번 대선 때 법정 선거비용 한도액이 350억여원이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는 노 후보측은 "준법 선거를 훌륭히 치를 수 있을 정도의 자금 마련은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국고보조금이 120억여 원이 나오는 데다 노 후보 중심의 신당을 만들어 후원회를 열면 법정 선거비용은 충분히 충당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여기에다 기업들이 선관위에 제공한 지정 기탁금도 있다. 노 후보는 "100만명으로부터 1만원씩 거둘 수 있는 능력이 나에게는 있다"고 말했는데 노 후보측은 이를 '100만명 국민 서포터스'라는 국민 모금 방식으로 구체화하는 계획을 진행시키고 있다.
/고태성기자 tsgo@hk.co.kr
■ 민, 新黨추진 뒤에는…
민주당이 숱한 당내 논란에도 신당창당을 추진하는 배경에는 대선을 앞두고 턱없이 부족한 당 재정을 메우려는 현실적 사정도 있다. 민주당은 이미 올해 거의 연간 모금액 한도까지 후원금을 모금, 당 재정이 바닥 났는데도 더 이상 후원회를 열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신당을 창당하면 후원회를 통해 새롭게 모금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중앙선관위관계자는 15일 "신당 창당준비위가 선관위에 일단 등록되면 창당준비위가 지정하는 후원회를 결성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완전히 새로운 당으로서 후원금을 모금할 수 있다"고 밝혔다.
중앙당 후원회를 통한 정당의 연간 모금액 한도는 300억원이고, 선거가 있는 해는 평년의 2배인 600억원이다. 모금액 중 3분의 2까지 당에 기부할 수 있어 올 해는 당 후원회를 통해 400억원까지 마련할 수 있게 된다.
민주당은 3월부터 16개 시·도 별로 치러진 국민참여 경선과 6·13 지방선거, 8·8 재보궐선거 등 잇따른 선거에 막대한 자금이 투입돼 재정이 고갈된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사용중인 당사 건물조차 월 3억원의 임대료를 지불하며 임대 기간을 겨우 연장해가고 있는 실정이다.
한 당직자는 "분기별로 지급되는 정당 국고보조금(경상보조금) 85억원과 지방선거 보조금 260억원도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도 "대선 무렵에 지급될 115억원 정도의 선거보조금에만 무작정 기댈 수는 없지 않느냐"며 "신당을 창당하면 후원회를 통해 어느 정도 자금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박정철기자 parkjc@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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