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3월25일 치러진 11대 총선에서 국민당은 전국구를 포함해 25명의 당선자를 냈다. 당 간부로서 지역구에서 당선된 사람은 내가 유일했고 4선으로 당내 최다선 의원이었다. 이런 까닭에 4월7일의 당직개편에서 나는 부총재가 됐다.5월6일 11대 국회 제106회 임시국회 때 교섭단체 대표 연설이 있었다. 나는 부총재였지만 국민당을 대표해 대표연설을 하게 됐다. 김종철(金鍾哲) 총재가 원외였기 때문이다.
전날 저녁 나는 직접 연설문을 썼다. 어느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았다. 나만의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대통령 직선제와 군의 정치적 중립을 촉구하기로 결심했다. 신군부의 서슬이 시퍼렇던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내용이었다. 때문에 연설문의 사전 인쇄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만에 하나 연설문 내용이 당국에 흘러 들어가면 제동이 걸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
6일 오전 본회의가 시작됐고 나는 연단에 올랐다. "이 나라에 자유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평화적 정권 교체가 이뤄지고 정치 보복이 사라지는 풍토가 조성돼야 합니다.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은 임기가 끝나는 7년 후에는 스스로 물러날 것을 약속했습니다. 나는 전 대통령의 단임 의지를 믿습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의석에서는 별 반응이 없었다. 나는 말을 이었다.
"그러나 이 사람이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전 대통령이 임기를 마치고 물러난다고 해서 결코 평화적 정권 교체가 이뤄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문제는 국민의 진실된 의사가 얼마만큼 자유롭게 선거라는 과정을 통해 반영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믿습니다. 때문에 민의를 직선적이고 효율적으로 반영하는 길은 대통령을 직접 선출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5공화국 들어 국회에서 대통령 직선이라는 단어가 처음 튀어 나오는 순간이었다. 본회의장에는 갑자기 긴장감이 감돌았다. 여당은 물론이고 야당 의원들조차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보복 풍토가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국민 화합과 국력 결집을 바라는 충정에서 입니다.…5공화국이 출범하고 국회가 새로 구성된 마당에, 대통령은 정치쇄신법에 묶여 있는 모든 인사들에게 하루 속히 동참할 기회를 줄 것을 촉구하는 바입니다."
의석은 다시 술렁거렸다. "군의 사기 진작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군이 본연의 임무인 국토 방위에만 전념하고 정치는 정치인에게 맡겨야 합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봐도 위험 수위를 넘나든 발언이었다. 나의 대표연설은 다음날 조간신문을 크게 장식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나는 집권 세력으로부터 유·무형의 압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나중에 들으니 그들은 나를 가장 까다로운 정치인의 하나로 분류했다고 한다.
1982년으로 접어 들면서 제5공화국에는 치명적인 대형 사건이 잇따라 터져 나왔다. 의령 경찰관 총기 난사 사건과 장영자 어음사기 사건이었다. 두 사건으로 정의 사회 구현이라는 전두환 정권의 구호는 퇴색하고 말았다.
때 맞춰 도미한 김종철 총재를 대신해 총재 권한 대행을 맡고 있던 나는 정부 여당을 거세게 비판했다. "관련자를 의법 처단하고 국정조사권을 즉각 발동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총리 해임안과 국정조사 요구는 국회 다수 의석을 점하고 있는 민정당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다. 나는 곧바로 기자회견을 통해 "대통령은 총리와 관계 장관들을 즉각 해임해야 한다. 또 무엇보다 대통령 주변 인사에 대한 정리를 촉구한다"고 한껏 나아갔다. 해임안은 부결됐지만 한달 여 뒤 총리 교체를 포함한 개각이 있었다. 어쨌든 나의 요구가 부분적으로나마 받아 들여진 셈이다. 그러나 이 때 나는 신군부에게 미운 털이 박혔고 이후 내가 국민당 총재 선거에 나섰을 때 고스란히 되돌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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