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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수 칼럼](2189)9·11 1주년, 뉴욕의 그라운드 제로에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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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수 칼럼](2189)9·11 1주년, 뉴욕의 그라운드 제로에서(하)

입력
2002.09.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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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1주년을 맞은 미국은 애국심과 추모열기로 들끓고 있다. 갓 블레스 아메리카/ 아메리카는 잊지 않는다/ 전쟁하는 아메리카…. 가는 곳마다 아메리카를 외치는 표어가 넘치고, TV는 며칠째 테러관련 프로를 반복해서 방영하고 있다. 국가를 부르며 눈물 흘리는 사람들을 하루에도 몇 번씩 화면에서 볼 수 있다. 뉴욕의 그라운드 제로, 워싱턴의 국방부 건물, 펜실베이니아의 생크빌 등 1년 전 테러의 현장들은 추모 인파와 성조기로 뒤덮였다. 조지 W. 부시 대통령도, 콜린 파월 국무장관도, 거리의 시민들도 옷깃에 성조기 배지를 달고 있다.11일 그라운드 제로에서 열린 추도식에서는 9·11 희생자 3,025명의 이름을 2시간 반에 걸쳐 일일이 호명했다. TV는 하루종일 희생자 명단을 자막으로 내보내면서 그들을 기억하자고 촉구했다. 11일자 각 신문에는 세계무역센터 안에 있던 각 회사들이 희생된 사원들의 이름과 사진을 넣어 만든 추모 광고들이 많은 지면을 차지했다. 전시를 방불케 하는 엄청난 추모 열기다.

미국은 지금 '전쟁 중'인가. 작가 수잔 손탁은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반 테러 전쟁은 암이나 약물에 대한 전쟁처럼 은유이며, 시작과 끝이 없다는 점에서 가짜 전쟁이다"라고 주장하여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9·11 사태를 '전쟁'으로 몰고 가려는 부시 행정부를 신랄하게 비난했다.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도 뉴욕타임스에서 비슷한 주장을 펴고 있다. "9·11은 진주만 사건과 같은 군사도발이라기보다는 도덕성에 관한 문제라는 성격이 강하다. 또 9·11에 대한 불안은 일본의 고베 지진과 같이 천재지변에 가깝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반 테러 전쟁이란 범죄와의 전쟁처럼 끝이 없는 것이다. 전쟁은 승전과 패전이 분명해야 하는데 9·11은 그렇지 않다"고 그는 말했다.

3,025명에 이르는 9·11 희생자의 이름을 목메어 부르면서 추모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지만, '9·11 현상'에는 뭔가 혼돈이 있다. 미국은 정말 전쟁 중인가. 전쟁 중이라면 구체적으로 누구와 싸우고 있는가가 분명치 않기 때문이다. 교포 2세로 컬럼비아대에서 문학을 공부하고 있는 캐더린 김은 이렇게 말했다.

"테러공격으로 수 천명의 살상자가 나왔다는 점에서 9·11 사태를 전쟁이라고 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피난 가려는 사람도 없고, 비상용품을 사재기하는 사람도 없고, 우왕좌왕하는 사람도 없으니 이 사태를 전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사람들은 때때로 천재지변을 두려워하듯이 앞으로 다리가 무너지지 않을까, 지하철이 붕괴하지 않을까 하는 식의 불안을 느끼고 있다. 나는 부시 행정부가 전쟁 분위기를 고조시켜 이라크 침공을 위한 공감대를 얻어내려는 게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1주년을 맞아 추모 분위기가 확실히 과열되고 있다."

미국이 누구와 싸우고 있느냐에 대해 모두가 모호한 감정을 품고 있다. 테러집단 혹은 테러 지원집단으로 지목된 알 카에다나 탈레반 정권을 상대로 싸울 때는 뚜렷한 적의 얼굴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오사마 빈 라덴은 실존이 아닌 '환영'이 되었다. 그가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알 카에다를 지배하는지, 아닌지 알 수 없다. 알 카에다가 존속하고 있는지도 분명치 않다.

전쟁을 하려면, 전쟁에 대한 강한 공감대가 형성되려면, 구체적인 적이 있어야 한다. 희미한 '악의 환영' 오사마 빈 라덴으로는 부족하다. 분명한 '악의 화신'이 눈 앞에 있어야 전의와 적대감이 불타오를 수 있다. 사담 후세인은 분명한 악의 화신으로 점지된 인물이다.

부시 대통령은 11일 그라운드 제로에서 희생자 유족들과 일일이 악수하고 포옹하면서 그들을 위로했다. 미국 역사상 자국 영토 안에서 적의 공격을 받아 많은 국민이 희생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그 엄청난 재앙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가 부시의 과제다. 그는 성조기 배지를 옷깃에 달고 12일 유엔에서 연설하며 사담 후세인을 맹렬하게 비난했다. "정통성이 없는 정권은 권력도 잃어야 한다"고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 나라가 신의 가호아래 새로운 자유를 탄생케 하고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게 하는 것이 산 자들의 사명"이라는 게티스버그 연설과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생명, 자유, 행복의 추구 등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지닌다"는 독립선언문이 9·11 1주년 추도식에서 낭독됐다. 그것은 미국이 전 세계에 보내는 강력한 메시지다. 테러에 대한 단순한 응징을 넘어 미국이 건국 이래 지켜온 꿈과 이상을 지구상에 펼쳐나가겠다는 선언이다.

부시의 도전은 간단치 않다. 사담 후세인을 쳐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국제사회에서 강력한 견제를 받고 있고, 미국 내 반대여론도 만만치 않다. '미국의 꿈과 이상'이라는 깃발을 들고 전쟁을 일으켜 또 다른 희생을 불러야 한다는 것이 그의 딜레마다.

/장명수 본사 이사 msch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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