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은 장식이 아니라 성찰이다.' 김민수(金玟秀·42) 전 서울대 미대 교수의 디자인론이다. 스승들의 친일 행적을 비판한 것이 빌미가 돼 교수 재임용에서 탈락한 이후 4년간 복직 투쟁 중에 있는 디자인 문화 비평가 김씨가 쓴 '김민수의 문화 디자인'(다우 발행). '코페르니쿠스적이거나 아니면 바보 같은' 행적만큼이나 남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다.부제를 '삶과 철학이 있는 디자인 이야기'로 삼은 이 책은 디자인을 폭넓은 사회 문화적 맥락 사이의 소통으로 바라보고 있다. '내공' '깔때기' '새 됐어' 등 생동감 있는 구어체, 지하철 환승통로나 한강의 다리들을 소재로 삼은 친숙함, 묵직하고 진지한 성찰 등이 어우러져 있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책에 실린 글의 성격마다 '권법을 달리' 하며 독자에게 다가서고 있다.
"디자인은 사회적 생산물입니다. 철학을 생활 속에 구현하는 디자인이 좋은 디자인이지요. 사고 뿐 아니라 실천에서 세상과 소통하는 문제야 말로 디자인의 핵심입니다. 삶의 문제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디자인은 '쥐뿔'도 아니에요."
저자가 보기에 디자인은 '누적된 시간의 켜' 속에서 나오는 역사적인 산물이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진지한 고민에서 길어 올리는 창작물이다. 그는 일본식 근대화의 잔재가 관성의 법칙으로 확대재생산된 88 올림픽 공식 포스터, 경찰청 포돌이 로고나 마구 파헤쳐진 인사동 골목길을 예로 들며 "전통과 단절하는 이노베이션이 아닌, 전통적 삶의 흐름 속에서의 리노베이션이 과제"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창조적인 디자인인가. 김 교수는 2002년 6월 월드컵의 열기를 꼽는다. "대한민국 역사상 이보다 더 큰 감동을 준 디자인은 없었다"는 것이다. "이제까지의 디자인은 형식적으로 틀이 만들어져 사회속에 내던져진 것입니다. 월드컵 열기는 공동체의 자발적인 기운에서 생겨나, 과거에는 촌스럽게만 생각되던 태극기를 새로운 코드 속에서 갱신시켰죠." 디자인은 한 독창적 개인의 산물이 아니라 개인을 둘러싼 문화적 역사적 맥락에서 나온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의 힘에 대해 사회가 공유할 수 있는 자의식이 필요하다. 그런 자의식 없이 '산업시대엔 뒤졌지만 정보시대엔 앞서가자'는 속도전 같은 구호나 한국적 디자인이니 글로벌 디자인이니 외치는 것은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
'시간의 켜'가 쌓이고, 삶에 대한 성찰이 우러나온 디자인의 예로 그는 양화대교 옆 선유도 공원을 든다. "예전 정수장 시설물의 흔적을 곳곳에 남겨두면서 리노베이션을 해 굉장한 운치를 자아내죠. 자신의 삶에서 출발했을 때 글로벌 디자인도, 한국적 디자인도 가능해지는 겁니다. 김장독 냉장고나 삼성의 핸드폰은 이 땅의 식생활과 젊은이들의 통신 문화에서 출발해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러한 성찰적 디자인이 사회와 국가 운영의 차원까지 확대되어야 할 문화적 화두라고 강조했다.
/이종도기자 ecri@hk.co.kr
사진 배우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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