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27일 새벽이었다. 박준규(朴浚圭) 당의장이 집으로 전화를 걸어 "대통령이 돌아가셨다"고 유고 소식을 전했다. 열흘 전쯤 김재규(金載圭) 중앙정보부장이 한 말이 퍼뜩 떠올랐다. 김 부장은 그 때 심각한 표정으로 "차지철(車智澈)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 나라가 걱정된다"고 말했다. 사건의 전모를 정확히 모르면서도 대통령 유고가 김 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의 갈등과 관계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내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11월3일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국장을 치른 공화당은 12일에 김종필(金鍾泌)씨를 새로운 공화당 총재로 선출했다. 나는 박 대통령이 없는 이상 일단 그를 중심으로 일치단결하는 게 당을 살리는 길이라 생각했다. 김종필 체제를 갖춘 공화당은 김 총재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이 선출하는 대통령에 입후보할 것이냐의 여부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당무회의에서 난상토론이 벌어졌다.
일부 당 간부들의 생각은 이랬다. "정치는 우선 권력을 잡고 봐야 한다. 개헌 후 직선에 나서는 것은 차후의 문제다."
그러나 나를 비롯해 정일권(丁一權) 김창근(金昌槿) 의원 등의 생각은 달랐다.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선출하는 대통령은 의미가 없다. 헌법을 고친 뒤 떳떳하게 대통령 선거에 나서야 한다." 끝내 의견이 모아지지 않았고, 최종 결정은 김종필 총재에게 일임됐다.
김 총재는 고민 끝에 유신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고 개헌 후 대선에 나서기로 했다. 김 총재가 무엇 때문에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는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당시 부총리였던 신현확(申鉉碻)씨로부터 군(軍)이 김종필 총재의 간선 대통령 출마에 반대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은 있다.
아무튼 정치는 수순대로 흘러갔다. 12월6일 유신헌법에 의한 제 10대 대통령으로 최규하(崔圭夏) 대통령 권한대행이 선출됐다. 이때만 해도 순조로운 듯하던 정치 일정은 대통령 선출 엿새 만에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이른바 12·12 사태가 터진 것이다. 전두환(全斗煥) 합동수사본부장을 정점으로 한 신군부는 유혈 참극까지 빚으며 정승화(鄭昇和) 계엄사령관을 체포하고 완벽하게 군을 장악했다. 신군부의 권력장악 기도가 언제부터 진행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쩌면 당시에 이미 시나리오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숨막히는 사건과는 별도로 유신의 압제에서 풀려난 우리 사회에는 민주화 욕구가 흘러 넘쳤다. 1980년 2월29일 정치활동 규제에 묶여 있던 김대중(金大中)씨가 복권되면서 바야흐로 3김 시대가 열렸다. 3김씨는 직선제 개헌에 의한 뜨거운 대권 경쟁에 들어갔다.
사회 전반에 봄이 넘쳐 흐르고 있을 때 신군부는 서서히 자신들의 시나리오를 드러냈다. 4월14일 최규하 대통령은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임명했다. 이를 두고 외국언론에서는 "전두환 중장이 현역 군인으로서 대통령의 중요정책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교도통신), "뒤에 있던 전 중장이 표면에 나섰다"(요미우리신문)는 등 중요한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나 3김씨는 이를 주의 깊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영삼(金泳三) 총재는 "민주화 일정은 예정대로 진행될 것"이라고 했고 김종필 총재는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을 문제 삼는 것이 문제"라며 대수롭지 않다는 입장이었다. 김대중씨는 "반민주 세력에게 구실을 줘서는 안 된다"고 경계했지만 우려 표명 수준에 머물렀다. 나 또한 들은 소문이 있어 김종필 총재의 특보였던 장영순(張榮淳) 의원에게 "육사 11기생들을 주목하라"고 조언했지만 특별한 정보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신군부는 권력 장악을 위해 치밀하게 움직이고, 3김씨는 대권 경쟁에 빠져 있는 동안 시간은 흘러갔다. 5월 들어 계엄 해제와 과도기 단축 등을 요구하는 학생 시위가 가두 시위로 발전했고 신군부는 기다렸다는 듯 칼을 빼 들었다.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 확대 조치를 취하는 동시에 3김씨에게 족쇄를 채웠다. 김종필 총재를 부정축재 혐의로 검거했고, 김대중씨를 내란음모 혐의로 구속했으며, 김영삼 총재를 상도동 자택에 연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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