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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영원한 청년 이만섭(41)10대 의원 시절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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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영원한 청년 이만섭(41)10대 의원 시절④

입력
2002.09.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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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당 김영삼(金泳三) 총재의 뉴욕타임스 회견(1979년 9월16일)은 정국에 회오리 바람을 몰고 왔다. 김 총재는 회견에서 "미국은 국민과 끊임없이 유리되고 있는 정권,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다수 가운데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지를 분명하게 밝혀야 할 때가 왔다"고 말했다. 김 총재는 이어 "내가 미국 관리들에게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에 대한 공개적이고 직접적 압력을 통해서만 그를 제압할 수 있다고 말해 왔지만 그들은 한국 국내 정치에 개입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여 왔다"며 "그렇다면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3만여명의 지상군을 두고 있는 것은 한국 국내 문제 개입이 아니란 말인가"라고 물었다.공화당은 김 총재의 발언을 '용공적 이적 행위이자 국회의원으로서의 품위를 손상한 행위'라고 격렬하게 비난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김 총재의 의원직 제명을 추진했다. 공화당이 잡은 D데이는 10월4일이었다. 다음날이 추석이어서 신문이 휴간하는 점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당시 신민당 의원들은 제명안 처리를 막으려 본회의장 단상을 점거했다. 공화당은 본회의장에서 정상적인 방법으로 제명안을 처리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경호권을 발동한 뒤 공화당과 유정회 의원들을 국회 146호실로 모았다. 출입구와 복도에는 사복 경찰과 국회 경위들이 인의 장벽을 치고 야당 의원들의 출입을 막았다. 그런 가운데 146호실에서 공화당과 유정회 의원 159명이 참석한 본회의가 열렸다. 나를 비롯해 몇 명의 공화당 의원들이 의문을 표했지만 유신 말기로 치닫고 있던 당시 의원 개개인의 의견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결국 제명안은 참석자 전원의 찬성으로 가결됐다. 우리 의정 사상 초유의 의원 제명이었다.

나는 한없이 우울했다. 공화당의 막무가내식 밀어 붙이기의 끝이 보이는 듯했다. 김영삼 총재와는 정치부 기자 시절인 3대 국회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으니 인간적으로도 가까운 사이였다.

공화당은 이제 막다른 골목까지 몰려 있다는 침통한 생각으로 의사당을 막 나서는 순간이었다. 같은 당의 박찬종(朴燦鍾) 의원이 내게 말을 건넸다. "이 선배님, 큰일 났습니다. 장차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답답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글쎄, 앞날이 걱정입니다."

김영삼 총재가 제명되자 신민당 의원 60명 전원과 통일당 의원 3명이 반발, 한꺼번에 국회의원 사퇴서를 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사태 해결이 불가능한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공화당 강경파 내부에서는 야당 의원들의 사표를 선별 처리하자는 주장까지 나왔다.

정말 갈 데까지 간 정국이었다. 10월4일 대구 경북대 영남대 계명대생들의 유신철폐 데모 불길은 15일 부산으로 옮겨 붙었고 16일 부산대생 5,000여명이 가두시위에 나서면서 부마사태로 번졌다.

나라꼴이 엉망이 되자 나는 국회의원인 것이 부끄럽기까지 했다. 그리고 온갖 불길한 생각이 다 들었다. "어쩌면 다시 4·19와 같은 사태가 올지 모른다. 그 때도 대구에서 데모가 시작되지 않았던가. 그렇게 되면 나라가 어떻게 될까…."

10월17일은 유신 체제의 생일이었다. 그날 저녁 청와대 영빈관에서는 공화당 과 유정회 의원들, 각료들이 빠짐없이 참석한 가운데 만찬이 열렸다. 나도 그 자리에 있었다. 만찬 내내 마음은 천근만근이었다. 부산에서 유신 철폐를 외치며 데모가 벌어지고 있는 그 시각에 유신 선포 기념 파티라니….

그래선지 그날 따라 대통령의 얼굴도 밝지는 않았다. 구자춘(具滋春) 내무장관이 들락날락하며 대통령의 귀에 대고 무언가를 보고했다. 기념 만찬이 끝난 지 불과 두어 시간 후인 18일 0시를 기해 부산에 비상계엄이 선포됐고 각 대학에 는 휴교 조치가 내려졌다. 그러나 계엄령은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었다. 유신 반대, 민주화 열기를 더욱 고조시켰을 뿐이었다. 18일 저녁에는 부산 시민들까지 학생 시위에 합류했고 급기야 불길은 마산으로 번져 나갔다.

유신의 종말이 코 앞에 닥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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