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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당 사건은 中情 조작극"/의문사委 밝혀… 물고문·전기고문등 자행 진술강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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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당 사건은 中情 조작극"/의문사委 밝혀… 물고문·전기고문등 자행 진술강요

입력
2002.09.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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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중앙정보부가 "공산계 불법단체인 인민혁명당이 민청학련을 배후 조종해 유혈 폭력 혁명으로 정부를 전복하고 공산정권을 수립하려 했다"고 발표, 8명을 사형에 처했던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완전 조작됐다는 사실이 국가기관에 의해 처음 확인됐다.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한상범·韓相範)는 12일 기자회견을 갖고 중앙정보부(당시 부장 신직수·申稙秀)가 조직결성의 기본 증거인 강령, 규약, 조직문서, 감청기록 등도 전혀 없이 라디오, 서적, 학생 선언문 따위로 지하당의 존재를 조작해냈다고 밝혔다.

▶고문실태

이 과정에서 중정은 피의자들에게 구타, 물고문, 전기고문 등 참혹한 고문을 자행했다고 의문사위는 밝혔다. 인혁당 피의자들이 수감됐던 교도소 교도관들은 "온몸에 피멍이 든 피의자들 대부분이 정상적으로 걷지도 못했다"며 "일부 인사는 물고문으로 폐농양증이 생겨 기침을 할 때마다 피가 나왔다"고 증언했다. 이러한 끔찍한 고문은 진술을 조작하기 위한 것이었다.

▶진술조작

전 중정 간부는 "중정 인혁당 재건위 사건 수사팀장 이었던 윤모씨가 '물건(조작사건)을 만들라'고 지시했다"고 위원회에 진술했으며, 당시 수사관도 "윤씨의 지시에 따라 피의자에게 '유신을 비방했다'는 진술을 강요했다"면서 "처음에 거부하다가도 고문을 하면 결국 시키는 대로 불었다"고 밝혔다. 특히 중정은 사건조작의 주체를 감추기 위해 경찰이 진술조서를 작성토록 했으며 작성장소도 중정이 아닌 구치소, 경찰서 등으로 조작했다. 당시 수사관은 "직원들은 기록에 이름을 남기려 하지 않았다"며 "수사팀장 윤씨도 '인혁당 재건위는 경찰이 조사한 것으로 하라'고 지시했다"고 진술했다.

이후 사건이 검찰에 넘어간 뒤에도 중정의 간섭은 계속됐다. 한 수사관은 "검찰에서 피의자 진술을 받을 때 중정 직원들이 상시 입회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피의자들이 기계적으로 조작된 사실을 시인했다"고 말했다.

당시 공판기록에는 피의자들이 "정부를 전복하고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려 했느냐" "인혁당 재건위를결성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시인한 것으로 돼 있으나 이것 역시 모두 조작된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재판과정을 지켜본 변호사들과 교도관, 피의자 가족들은 "피고인들이 부인해도 기록은 정반대로 이뤄졌으며, 피고인이 고문수사에 항의하는 발언은 모두 누락됐다"고 말했다.

의문사위는 "이러한 공판기록 조작에 따른 대법원의 확정판결로 피의자 8명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20시간 만에 형이 집행되는 헌정사상 최악의 판결이 내려졌다"고 설명했다.

▶재심 신청 움직임

의문사위는 이날 조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이로써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재심을 청구할 만한 증거들이 확보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덧붙여 유족들의 오랜 숙원인 재심이 이루어 질 수 있을지 주목된다.

천주교 인권위원회 인혁당 대책위는 이날 유족들과 함께 기자회견을 갖고 "재심을 청구해 피해자들과 유족들의 명예회복 및 보상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의문사위는 그러나 "조사 기간이 짧아 이 사건에 관련된 장석구(張錫救·당시 46세·대구일보 기자)씨의 사인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못한 점 등이 아쉽다"고 말했다.

/이진희기자 river@hk.co.kr

■ 인혁당 사건

대학가를 중심으로 유신반대 운동이 확산되던 1974년 당시 중앙정보부는 느닷없이 학생운동세력인 '민청학련'의 배후에 '인혁당 재건위'라는 공산조직이 있다고 발표했다.

원래 인민혁명당은 64년 중정에 의해 "국가전복을 목적으로 북의 사주에 의해 만들어진 대규모 공산 지하조직"으로 발표됐으나 검찰과 법원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정은 10년 만에 이를 재건위로 '부활'시킨 뒤 이를 빌미로 민주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갔다.

살벌한 유신체제 속에서 검찰과 법원은 중정의 조사결과를 그대로 인정했다. 특히 사형을 선고받은 8명은 선고 20시간 만에 전격적으로 형이 집행돼 지금까지 '사법살인'의대표적 사례로 거론되고 있다.

한편 의문사위는 12일 "당시 사건 관련 문서에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직접 서명했었다"고 밝혀, 이 사건이 중정 이상의 차원에서 조작됐으리라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이진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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