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심훈(1901.9.12∼1936)의 장편소설 '상록수'(1935)를 처음 읽은 것은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다. 국어 과목의 방학 과제였던 독후감을 쓰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며칠을 두고 읽을 요량으로 표지를 들췄는데, 이야기에 흠뻑 빠져 밤을 새워 단숨에 읽게 되었다. 여주인공 채영신이 병들어 죽는 장면에서는 눈물을 줄줄 흘렸던 것 같다. 소설 앞부분에서 남자 주인공 박동혁이 입으로만 민중을 위하는 당대 여류 명사들을 비판하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그로부터 20년쯤 뒤 그 소설을 다시 들췄다가, 어린 시절의 감흥이 되살아나지 않아 중간에 덮고 만 적이 있다. 세월의 더께가 기자의 감성을 무디게 만든 탓일 수도 있고, 문학 작품을 살피는 기자의 시각이 달라진 탓일 수도 있을 것이다.'상록수'는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젊은 지식인들을 농촌으로 이끈 브나로드('민중 속으로'라는 뜻의 러시아어) 운동을 그리고 있다. 그래서 그것은 기본적으로 계몽소설, 농촌소설, 민중소설의 계보 안에 있지만, 채영신과 박동혁 두 주인공의 순정한 사랑 덕분에 건강한 연애소설로도 읽힌다. 심훈은 20대 전반부터 기자 생활을 하며 시와 소설을 썼고 영화에도 손을 댔지만, 죽기 한 해 전에 발표한 '상록수'를 통해 확고한 문명(文名)을 얻었다.
심훈의 시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그 날이 오면'일 것이다. 이 항일시의 전반부는 이렇다.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 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주기만 할 양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고종석/편집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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