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거지입니까? 여기는 쓰레기장이 아니에요."최악의 수해로 악몽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강원 강릉시 노암동 김정하(47)씨는 11일 동사무소에서 받아온 수재의연품을 박스 째 내다버리고는 언성을 높였다. 대전의 한 아파트 부녀회에서 보냈다는 박스 안에는 옷가지와 이불이 그득했지만 쓸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김씨는 "전부 해지고 때가 끼고 퀴퀴한 냄새까지 나는데 이런 옷을 어떻게 입느냐"며 "이런것을 의연품이라고 보내는 것은 수재민 가슴에 두 번 못을 박는 일"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못 입을 헌옷에 색동한복까지
수재지역으로 답지하는 구호품 가운데 쓰레기나 다름없는 헌옷과 필요없는 물품이 많아 수재민들을 두 번 울리고 있다. 강원 강릉시 옥계면 산계리 주민들도 최근 구호품으로 받은 옷 상자 때문에 속이 상했다. 주민 대부분이 노인인 이 마을에 전달된 옷상자에는 색동한복 등 유아복이 가득했고 그나마 몇 점있는 어른 옷도 낡은 한복에 털빠진 밍크코트, 오물 묻은 청바지였다. 주민 박모(65)씨는 "이런 옷을 어떻게 입으라는 건지…"라며 혀를 찼다.
충북 영동군 상촌면 궁촌리 수재민 이장호(42)씨는 "마을회관에 구호의류 상자를 쌓아 놓았지만 쓸만한 옷이 하나도 없어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는다"며 "도시 아파트 단지 등의 옷수거함을 마구 쓸어다 보낸 모양"이라고 말했다.
▶수재의연품 80%는 못 쓰는 물건
'쓰레기 수재의연품' 때문에 수재민들의 원성이 자자해지자 해당 지자체에선 별도 인력을 투입, 선별작업을 벌이고 있다. 이날 수재의연품 선별작업이 한창인 강릉시청 뒤편 공터는 쓰레기처리장을 연상케 했다. 누렇게 빛 바랜 이불에, 곰팡이 핀 구두, 다 찢어진 전기장판, 찌그러진 냄비에 엉뚱하게 구명조끼까지 섞여 있었다. 분리작업을 하던 한 공무원은 "이런 것들을 내려놓고는 기념사진까지 찍고 갔다"며 "80%는 바로 쓰레기장으로 보내야 할 물건"이라고 허탈해했다.
▶라면만 먹고 사나요, 쌀을 달라
특정품목에 집중되는 구호품 처리도 골치다. 상수도가 복구된 경북 김천시는 밀려든 생수 처리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충북 영동의 경우엔 라면이 답지하면서 수재 가구당 벌써 6상자의 라면이 전달됐다. 이에 따라 수재민들은 더 이상 라면은 질렸다며 쌀을 달라고 하소연하고 있다. 영동지역의 경우 라면은 처치 곤란할 지경이지만 쌀은 20㎏ 한 포만 배포됐다.
수재민 강모(41)씨는 "라면과 생수는 주체 못할 정도지만 정작 밥을 끓여먹을 취사도구와 쌀이 부족하다"고 하소연했다. 각종 세제와 모기향 등도 공급과잉 상태인 반면 취사도구와 고추장 된장 등 부식류는 기근이다.
/영동=한덕동기자 ddhan@hk.co.kr
김천=전준호기자 jhjun@hk.co.kr 강릉=김기철기자 kim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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