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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워치]한반도에 부는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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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워치]한반도에 부는 바람

입력
2002.09.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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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때면 북풍이네 병풍(兵風)이네 하는 음험한 바람이 부는 것이 우리 정치만의 오랜 질병은 아니다. 민주 정치의 표상으로 여기는 미국도 대통령 선거 때면 후보자의 병역과 사생활 등이 뜨겁게 논란되고, 여기에는 우리의 무슨 '풍' 처럼 음해·공작적 요소가 개입한다. 다만 그 바람을 집권 세력이 독단할 수 없고, 바람과 선거의 향방을 가르는 다툼이 의회와 언론 등 공론의 장(場)에서 비교적 공정하게 이뤄지는 점이 우리와 다르다.정치 세력들이 대등한 공격과 방어력을 갖는 세력 균형 위에, 때로 야당도 공작 바람으로 선거 대세를 장악한다. 대표적 사례는 1980년 대선 때 레이건·부시 후보의 공화당 진영이 '공적 1호' 호메이니의 이란과 은밀히 결탁, 미국 대사관 인질사태 해결을 지연시킨 것이 꼽힌다. 당시 민주당 카터 대통령은 인질구출 군사작전 실패와 지지 추락을 만회하기 위해 외교적 해결에 힘을 쏟았으나 공화당의 비밀공작에 막혔고, 결국 재선에 실패했다. 이 공작은 CIA 국장 출신 부시 부통령 후보와 CIA 고위직을 지낸 윌리엄 케이시가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두 사람은 파리에서 호메이니의 특사를 몰래 만나 적과 손을 잡았고, 그 준비는 CIA가 뒷받침했다.

CIA가 카터의 재선 저지 공작에 가담한 것은 도덕 외교를 표방한 카터가 CIA의 불법 해외공작을 규제하는 등 조직을 위축시킨 때문이었다. 한편 이란의 회교 지도부는 진보적인 카터보다 보수적 세계관을 가진 레이건을 선호했고, 무엇보다 회교 혁명 수호에 절실한 최신무기 지원 약속에 이끌렸다. 흔한 음모설 같지만, 레이건 정부에서 CIA 국장이 된 윌리엄 케이시는 실제 이란에 몰래 최신 무기를 팔고, 그 수익으로 중남미 우익 게릴라를 지원했다.

뒷날 레이건 행정부를 뒤흔든 이 이란·콘트라 스캔들은 미국 대외정책의 위선을 여지없이 폭로했다. 그러나 지루한 의회 청문회를 거쳐 실무자급만 처벌하는 것으로 흐지부지됐다. 민주당도 강경하지 않았고, 흔한 특별검사도 임명되지 않았다. 배경은 미국의 명분에 도무지 맞지 않는 이란과의 커넥션이 국익에 이바지했다는 정치 세력의 암묵적 공감이었다. 부시 부통령이 이란을 저버리고 그 숙적인 후세인의 이라크를 지원했다가, 대통령 때 다시 걸프전으로 초토화한 것 역시 국익을 우선하는 생리를 반영한다.

저들과 우리 정치의 '풍' 논란이 다른 점도 바로 이 것이다. 정파적 이해를 좇는 정략이 늘 개입하지만, 국익을 거스르지는 않는 것이다. 여기에 비해 우리 대선 정국을 어지럽히는 병풍 논란은 치졸한 정략이 두드러진다. 지난 선거 때 불거져 신랄하게 추궁한 병역 의혹을 이제 와서 무리하게 재탕하는 것은 국민을 식상케 하고 약효 또한 의심된다. 국익이 걸린 숱한 쟁점을 다 제쳐둔 채 매달리는 모습은 보기에 안쓰럽다.

다른 한 쪽에서 북한 김정일 위원장 답방설에 지레 북풍을 떠드는 것도 정략만 좇는 유치한 발상이다. 민족의 이익은 아랑곳없이 상대에게 유리하면 무작정 질시하는 그릇으로는 태풍에 이를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 한반도 정세 속에서 주도적으로 나라를 이끌 수 없다. 북한의 대내외적 변신과 북·일 정상회담 등은 호의적 정세 변화를 기대하게 하지만, 동시에 변화를 통제하려는 외풍 또한 거셀 것이다. 호의적 움직임에 악의가 담겼을 수도 있다.

남북의 장래에 중요한 고비마다, 진상이 모호한 '괴선박' 사건 등이 돌출한다. 공해를 지나던 어선으로 보이는 북한 배를 '괴선박'으로 떠들게 한 것이 미국 위성 정보였고, 김정일에 대한 음해성 보도가 난무하는 사실은 변화를 통제하려는 음험한 바람을 의심하게 한다. 클린턴 행정부 말기, 미국 항공사 직원이 북한 국가수반 김영남의 미국행을 막아 북·미 화해무드에 찬 물을 끼얹은 사건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나라 안 바람 싸움에 마냥 매달리다가는 바깥에서 부는 거센 태풍에 민족의 장래를 날려버릴 수 있다.

강병태 편집국 부국장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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