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 걸프전'은 이라크발 세계 공황의 신호탄인가. 미국의 대 이라크 공격이 점차 현실로 다가오면서 이 전쟁이 세계 경제에 미칠 영향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지난해 세계를 강타한 불황의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았고 미국의 회계부정 사태로 촉발된 세계 증시의 불안도 여전하기 때문이다. 석유자원의 보고 중동 지역을 뒤흔들 전쟁이 인류 최대의 에너지원인 석유 공급 불안을 야기할 경우, 세계 경제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고 전문가들은 우려하고 있다.
▶최악의 시나리오
영국의 BBC 방송은 8일 이라크 전쟁이 야기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보도했다. 미군의 파상 공세로 이라크에는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하고 주변 아랍국들의 수도에서는 대규모 반미·반정부 시위가 벌어진다. 중동지역 정부는 폭압정치를 통한 대응에 나서고 한 나라는 무정부상태에 빠진다.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은 스커드 미사일로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이스라엘은 보복공격에 나서며 결국 팔레스타인 분쟁은 역내 대결로 확산된다.
▶문제는 유가
올들어 세계 유가는 지난해보다 배럴당 10달러(50%) 가량 뛰어 올랐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이라크에 대한 무력응징을 선언한 6월 중순 이후에만 23%가 올라 최근 30달러선을 위협하고 있다. 현재 국제유가에는 배럴당 1∼5달러의 '전쟁 프리미엄'이 붙어있는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이라크 공격에 대한 불안이 이미 국제유가에 반영돼 있다는 얘기다.
일단 전쟁이 터져 이라크의 원유공급이 중단되면 국제유가는 더 오를 것이나 문제는 상승폭과 지속 기간이다. 분석가들은 "6∼9개월 가량 고유가가 지속되면 불황으로 연결될 수 있다"고 전망하고 있다.
유가 폭등은 물가 상승을 유발, 금리 인상 압력으로 작용한다. 조기 금리인상은 경제 회복세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 물가 상승으로 소비심리가 위축돼 경기 회복의 견인차 역할을 해 온 소비부문마저 정체될 경우 기업들의 수익성이 악화하고 실업자가 늘어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더블딥(경기 재하강)이 현실화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유가는 중동의 위기가 재연될 때마다 어김없이 세계 경제를 뒤흔드는 악재였다. 1차 오일쇼크 때는 당시 배럴당 3달러 수준이던 유가를 네 배(12달러)나 끌어 올렸다. 이란 혁명으로 촉발된 79년 2차 오일쇼크 때는 배럴당 12달러였던 유가가 24달러로 두 배가 됐으며 이듬해 이란-이라크 전쟁까지 가세하면서 처음으로 35달러 선을 넘어섰다. 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시작된 걸프전 당시 배럴당 17달러 선이던 유가는 급기야 40달러까지 폭등했다.
▶엇갈리는 전망
낙관론자들은 이라크전으로 인한 석유 파동은 단기간에 그칠 것이라고 주장한다. 수개월 전부터 거듭된 전쟁 예고로 이미 석유시장이 면역력을 갖춘 상태고 당장 이라크의 원유 생산(현재 하루 150만∼170만 배럴)이 끊긴다 해도 세계 일일 산유량(7,600만 배럴)과 비교할 때 미미한 수준이라는 것이다. 또 70년대와 달리 산업의 원유 의존도가 크게 낮아진데다 여러 차례 중동위기를 겪으면서 각국이 남미, 러시아 등지로 원유 수입선을 다변화한 점도 충격 흡수의 근거로 꼽힌다.
비관론자들은 전쟁의 충격을 간과하지 말라고 말한다. 모건스탠리의 경제 분석가 스티븐 로치는 "미국 증시 폭락이 대변하듯 세계 경제는 지극히 위태로운 상황"이라며 "걸프전 때보다 세계경제가 훨씬 미국 중심적이고 교역 중심적으로 변한 상황에서 이라크전의 충격은 주요 국가의 경제를 침체의 늪으로 빠뜨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석유전문 분석가 파델 가이트는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이 사우디 아라비아나 쿠웨이트 등으로 통하는 송유관을 파괴하는 것은 세계무역센터 공격보다 손쉬울것"이라며 "사우디의 원유 공급이 차질을 빚을 경우 국제 유가는 배럴당 50달러까지 치솟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용식기자 jawohl@hk.co.kr
■"일시적 충격… 국내영향 미미"
정부는 이라크전쟁이 터지더라도 단기전이 될 경우 국내 경제에 미칠 영향은 그리 크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일단 유가상승에 따른 타격이 우려되지만 고유가 추세가 오래 가지 않을 것으로 보이고 세계경제의 일시적 침체가 오더라도 다른 나라들보다 상대적으로 타격이 적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재정경제부 관계자는 11일 "지금은 전세계적인 경기회복 둔화세에 따라 석유수요가 살아나지 않는 가운데 오히려 공급과잉 가능성이 나타나고 있다"며 "전쟁이 발발해도 아프가니스탄 공격 때와 마찬가지로 30달러 이상의 유가 급등세는 1개월 내외에 그칠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연구원 정한영 박사 역시 "지난해 두바이유 평균가격이 19달러 선이었던 점을 감안할 때 최근 27달러선에 육박하는 유가에는 이미 전쟁 프리미엄이 3∼6달러 정도 반영돼 있다는 것이 시장의 분석"이라고 말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최근 "올해 남은 기간동안 유가가 25달러 선을 유지할 경우 국내 소비자물가는 연평균 2.8% 상승할 것"으로 예측했다. 따라서 전체 소비자물가에 대한 영향력 비중이 6%(가중치 60/1000) 정도인 유가가 3개월 정도 이상 급등세를 보여도 연간 소비자물가 목표치 3%에 영향을 주지는 못할 것이란 분석이다.
이라크전쟁은 거시경제 보다는 증시와 연관된 개별 업종에 민감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분석된다. 동원증권에 따르면 전쟁이 발발할 경우 연료 수입비중이 높은데다 달러표시 차입금이 많은 전력·가스업종과 운송업종이 단기 타격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반도체와 전기·전자, 자동차 등 수출대표업종은 전세계적인 소비위축에 따른 수출 감소 위험에 노출될 것으로 보인다.
/장인철기자 icjang@hk.co.kr
■美, 경기침체때 전쟁 "운운" 10년전 걸프전과 닮은꼴
미국 정부가 이라크에 대한 군사적 행동을 준비하고 있는 현 상황은 미국이 이라크를 처음으로 공격했던 10년 전의 걸프전 당시와 유사점이 많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무엇보다 전쟁 당사자가 미국과 이라크라는 점이 그렇고 미국 경기가 그다지 좋지 않은데다 미국 정치 일정이 선거를 앞두고 있다는 점이 공통적이다. 1990년 8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걸프전이 시작될 당시 미 경제는 하강기에 있었다. 88년 4.2%를 기록했던 미 경제성장률은 89년 3.5%, 90년 2·4분기 0.9%로 급락했다. 걸프전 개전으로 경기는 더욱 곤두박질쳐 3·4분기부터 3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했다.
지난해 9·11 테러로 촉발된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도 미 경제 상황은 이와 흡사했다. 90년대 장기호황에서 벗어난 미 경제는 2000년 3월 주가 폭락을 거쳐 지난해 하반기 들어 본격적인 경기침체 국면에 빠져들었다.
현재는 이같은 침체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기업회계 불투명, 경상수지 적자 확대, 기업 수익성 저하 등으로 회복이 지연되고 있는 상황이다. 올 1·4분기에는 6.1%의 고성장률을 보였지만 3·4분기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3% 정도로 추산되고 있고 올해 연간 성장률이 3%에 이를 수 있을지 여부가 관심이다.
걸프전 당시보다 더 나쁜 측면도 있다. 걸프전 때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경기부양을 위해 전쟁전 8.0%였던 금리를 91년 2월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6.25%로 인하했다. 그러나 현재 미 금리수준은 지난해 연이은 인하 조치로 1.75% 수준까지 떨어져 39년 만의 최저 수준이다. 이런 상황에서 FRB가 금리를 추가 인하할 수 있는 여력이 크지 않아 전쟁이 발발할 경우 통화정책이 어렵다는 것이다.
/남경욱기자 kwnam@ 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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