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475년 9월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백제의 왕도 한성(漢城)을 포위하였다. 고구려 군은 군사를 네 길로 나누어 공격하고, 바람을 이용해 불을 놓아 성문을 불태웠다. 백제의 개로왕(蓋鹵王)은 곤궁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기병 수십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가 서쪽으로 달아나다가 고구려 장수에게 잡혀 아단성(阿旦城) 아래에서 참수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는 백제 한성의 함락 현장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그로부터 1,500여 년이 흐른 1988년 어느 겨울 밤, 필자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필자는 서울대박물관 작업실에서 몽촌토성(夢村土城)에서 출토된 토기 조각들을 복원하느라 밤샘작업을 하고 있었다. 수많은 백제 토기 조각들 중에서 낯선 토기조각 하나를 찾아냈고, 한 달 여의 작업 끝에 토기를 복원해냈다. 이제까지 남한에서는 출토된 예가 없는 전형적인 고구려 토기였다. 계속된 작업으로 상당량의 고구려 토기들을 복원했고 이 토기들이 바로 백제 한성을 함락시킨 고구려 군이 사용한 것들임을 밝혀냈다.
이를 계기로 필자는 한강 유역에서 고구려의 자취를 찾아나섰다. 97년 서울 광진구와 경기 구리시 경계에 자리잡은 아차산의 고구려 보루(堡壘·성보다 작은 군사유적)를 발굴한 것은 큰 행운이었다. 아차산성은 삼국사기에서 개로왕이 참수된 아단성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제4보루는 15개의 고구려 보루 중 가장 전망 좋은 곳에 위치해있다.
97년 9월 22일 개토제를 지내고 군용 헬기장 표시석으로 사용되던 판석을 들어올리자 바닥에 검게 그을린 흔적들이 드러났다.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고구려 군대 막사의 온돌 뚜껑 돌을 오늘날 군인들이 헬기장 표시석으로 사용한 것이다. 이듬해까지 이어진 발굴 작업을 통해 국내에서 처음으로 고구려 군사요새의 전모를 밝혀낼 수 있었다.
아차산 4보루는 그야말로 요새였다. 유적의 둘레는 잘 다듬어진 성돌로 치밀하게 성벽을 쌓았으며, 내부에는 7동의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이 중 가장 큰 건물은 폭 10m, 길이 45m에 달하는데, 내부는 온돌을 갖춘 방 3개와 대형 저수시설 2개, 강당 등으로 구성돼 있었다. 이들 건물 외곽에는 건물에서 나오는 물을 처리하는 배수로가 나 있고, 유적의 한쪽 모퉁이에는 간이 대장간 시설도 갖추어져 있었다.
유적 내부에서는 엄청난 양의 토기류가 출토되었으며, 그릇 주인의 출신지와 이름을 새긴 '후부도 ○형(後 □都 ○兄)' 등 명문 토기도 10여 점이나 확인됐다. 그밖에 철제 투구를 포함해 많은 양의 철제 무기, 마구, 공구류도 출토되었다. 출토 유물의 분석을 통하여 아차산 제4보루에는 100여명의 고구려 군사들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475년 한성 함락을 전후하여 보루를 축조했다가 551년 나(羅)·제(濟)연합군의 북진 때 철수한 것으로 밝혀졌다.
작은 토기 조각 하나에서 시작된 필자의 고구려 연구는 이제 이 분야에서 전문가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아차산 고구려 보루 발굴 이후 경기 양주 지방과 임진강 유역에서도 이와 비슷한 성격의 고구려 보루들이 조사되었고, 최근에는 충북 청원과 대전에서도 고구려 유적이 확인됐다. 이를 통해 당시 고구려 군의 남하 경로와 한강을 둘러싼 삼국의 각축양상이 하나 둘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 고고학은 아직 반쪽 짜리 신세다. 중국과 북한에 산재한 수많은 고구려 유적들이 연구자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중국 여행이 자유로워졌다고는 하나 유적에 대한 전문가들의 접근은 철저히 통제되고 있다. 하루빨리 북한과의 공동연구가 이루어지길 바란다.
최종택 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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