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1일 이래 부시 행정부는 국민들에게 미국은 전쟁 중이라고 말해 왔다. 그러나 이 전쟁은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적의 성격을 감안할 때 예측가능한 결말이 없는 전쟁인 듯 보인다.미국의 어느 대통령이 암이나 가난, 약물에 대해 전쟁을 선포했다면 우리는 그 전쟁이 은유라는 걸 안다. 하지만 누가 미국이 테러리즘에 대해 선포한 이 전쟁을 은유라고 생각하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은유, 그것도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 은유다.
진짜 전쟁은 은유가 아니다. 진짜 전쟁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끔찍하고 다루기 힘든 갈등조차도 언젠가는 끝날 것이다. 하지만 이 반테러 전쟁은 결코 끝날 수 없다. 그것은 전쟁이 아니라 오히려 미국의 파워를 확대하기 위한 권한 부여의 표시일 뿐이다.
'우리는 하나로 묶여 있다'는 슬로건 아래서 반성을 요구하는 것은 애국심이 결여된 반대와 동일시되었다. 미국 정부가 사용하는 지하드 언어(선 대 악, 문명 대 야만)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테러 공격, 아니면 최소한 공격 이면의 불평불만이 지닌 합법성을 눈감아주는 것으로 비난 받아왔다.
다시 한번 미국이 치명적 급습의 대상이 돼 진주만 희생자보다 많은 수의 생명을 대가로 치른 후 2001년 9월 11일과 1941년 12월 7일의 비교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나는 1942년 12월 7일에는 사기를 유지하고 국민을 통합하기 위해 성대한 기념식이 필요했으리라고 보지 않는다. 그것은 진짜 전쟁이었고, 일년 후에도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허깨비 전쟁이고 그렇기 때문에 기념식이 필요하다. 그런 기념일은 많은 목적에 기여한다. 그날은 애도의 날이며, 국민적 유대를 공언하는 날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한 가지는 그것이 국가적 반성의 날은 아니라는 것이다. 반성은 우리의 도덕적 명징성을 훼손할지 모른다고 말해져 왔다. 물론 단순하고, 분명하고, 단합할 필요는 있다. 때문에 게티스버그 연설처럼 위대한 수사학이 가능했던 지나간 시대의 언어들이 차용됐을 것이다.
그러나 링컨의 위대한 연설들이 의식처럼 기념식에서 암송되고 재활용될 때 그것들은 완전히 공허한 의미가 돼 버렸다.
지난 9월 11일의 공격이 너무 끔찍하고 너무 파괴적이고 너무 고통스럽고 말로 하기엔 너무 비극적이었다는, 그래서 말로는 도저히 우리의 슬픔과 분노를 표현할 길이 없다는 허풍 뒤에 숨어서, 우리의 지도자들은 이젠 공허한 내용만 남은 타인의 언어로 자신들을 꾸밀 수 있는 완벽한 변명거리를 갖게 된 것이다.
무언가를 말하는 것은 논란을 불러올지 모른다. 실제 그것은 부지 중에 어떤 종류의 선언이 돼 반박을 불러 일으키게 될지도 모르므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최선이다.
나는 민주주의와 다원주의를 포함해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대부분의 것들에 반대하는 사악하고 혐오스러운 적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한 순간도 시민의 생명을 보호해야 할 미국 정부의 의무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다.
내가 의문스러운 것은 사이비 전쟁의 사이비 선언이다. 이런 행동들은 전쟁이라고 불려서는 안 된다. 끝이 없는 전쟁이란 없다. 국가가 절대 도전받을 수 없다고 믿고 있는 힘의 확대를 위한 선언이 있을 뿐이다.
미국은 이런 범법자들과 공범자들을 추적하여 잡을 모든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권리행사 방법에 전쟁만 있는 것은 아니다. 끝없는 전쟁이라는 위험하고 무뇌아적인 개념에 계속 호소하는 것보다 헌법의 권리와 국제협정을 덜 파괴하면서 미국의 적들을 억누를 수 있는 더 좋은 방법들이 있다.
수잔손탁 작가·비평가 /NYT신디케이트=뉴시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