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시아 연구의 권위자인 김호동(金浩東·48)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가 몽골제국이 남긴 역사학의 고전 '집사(集史)'의 첫 권 '부족지(部族志)'를 번역, 출간했다. '집사'는 몽골제국의 지배를 받던 일칸국(이란)의 재상 라시드 앗 딘(?∼1319)이 가잔 칸의 명을 받아 몽골족의 뿌리와 제국 팽창사 등을 집대성한 것. 당시 몽골 왕실에 전하던 비기(秘記) '금책(金冊)'을 기초 자료로 삼은 상세하고 정확한 서술로, 몽골제국과 관련된 수많은 기록들 가운데 백미로 꼽힌다. 특히 당시로서는 전례가 없는, 유럽 중국 등 주변 이민족의 역사와 지리까지 두루 다뤄 '인류 최초의 세계사'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페르시아어 원본의 난해함과 방대한 분량 탓에 지금까지 번역된 것은 1858년 러시아에서 출간된 뒤 옛 소련에서 보완한 '부족지' 러시아어본과 페르시아 문학 연구의 대가인 W. M. 색스턴 미 하버드대 교수가 1999년 펴낸 영역본이 고작이다. 따라서 김 교수가 내놓은 '부족지'(사계절 발행)는 세계에서 세번째, 아시아에서는 첫 번역본인 셈이다.
김 교수는 "'집사'는 몽골제국 등 중앙아시아 연구자들에게는 필독서이지만 국내에서는 중국에서 러시아어본을 재번역한 불완전한 텍스트를 참조해왔다"면서 "이번 번역본 출간이 그동안 변방으로 취급돼왔으나 우리 문화의 뿌리를 밝히는데 꼭 필요한 몽골 및 중앙아시아 연구가 활성화하는 데 밑거름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집사'는 몽골제국사를 다룬 1부와 주변 이민족 역사와 지리를 다룬 2, 3부로 구성됐는데 1부와 2부의 일부만 전한다. 1부 첫 권인 '부족지'는 몽골제국사의 본격 서술에 앞서 제국을 형성한 4개 부족의 계보를 밝힌 것으로, 구체적인 생활상도 기록돼있다. 몽골화한 투르크족의 일파인 삼림 우량카트 종족은 산양을 주로 키우고, 양치는 이를 매우 비천하게 여겨 부모가 딸을 욕할 때 "너를 양 꽁무니나 따라다니게 하는 사람에게 줄 테다"라고 말하면 딸이 목을 매달 정도였다는 등 각 부족의 생활 풍습을 흥미롭게 전한다. 김 교수는 1부의 나머지 부분도 '집사2-칭기즈칸의 역사', '집사3-칭기즈칸의 후예들'이라는 제목으로 2,3년 내 완역, 출간할 계획이다.
김 교수는 80년대 초 하버드대 유학 시절 색스턴 교수에게서 페르시아어를 배우다 텍스트로 사용한 '집사' 번역을 결심했다. 그러나 본래 전공인 중앙아시아 근세사 연구에 몰두하느라 한동안 잊고 지내다 5년 전부터 몽골제국사 연구로 눈을 돌리면서 본격적인 번역 작업에 착수했다. 김 교수는 "요즘 역사학계에서는 민족사, 지역사의 틀을 벗어나 보다 광역적 시각에서 세계사를 조명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한데 몽골제국은 여러 문명의 교류와 융합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더없이 좋은 사례"라고 말한다. 그는 이어 "국내에서는 몽골제국을 원(元), 즉 중국의 한 왕조쯤으로 여기는데 대단히 잘못된 생각"이라면서 "유라시아 전역을 지배한, 말 그대로 제국으로 자리매김해야 고려와 원의 관계도 제대로 밝힐 수 있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9·11 테러를 계기로 이슬람에 대한 관심이 폭증했지만 제대로 된 국내 연구서가 부족해 서양 학자들의 저술을 그대로 소개하는데 급급했다"고 비판한 김 교수는 "이제는 다른 문명권을 이해하는 우리 나름의 시각을 가져야 할 때가 됐고 그 첫 걸음은 고전들의 충실한 번역에서 시작해야 한다. 세계 각국의 다양한 고전들을 누구나 원할 때 찾아 읽을 수 있게 번역해놓는 것, 이것이 문화의 힘이다"라고 강조했다.
/이희정기자 jay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