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규씨의 시집 '낙타는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천년의 시작 발행)를 읽다가 '꽃 냄새가 있는 밤'이라는 시를 만났다. 들큼한 언어에 시큼한 삶이 버무려져 있다."어디서 꽃이 피는가/ 치약냄새보다 환한 꽃 냄새로/ 누웠던 밤이 벌떡 일어선다/ 제 울음소리에 놀란 고양이가/ 그림자를 버리고/ 이 지붕에서 저 지붕으로 넘어가고 있다." 모두 잠든 밤이다. 그런데 어디서 짙은 꽃 향기가 난다. 그 화향(花香)을 화자는 '치약냄새보다 환하'다고 말한다. 치약냄새는 치약 빛깔처럼 환하다. 이 공감각(共感覺)은 고스란히 꽃 냄새로 이월된다. 잠들었던 밤을 그 환한 꽃 향기가 일으켜 세운다. 꽃 냄새는 치약처럼 환하고 싸한 각성제다. 깨어난 밤은 꽃 향기로 환하다.
"달빛을 넘기며/ 잠이 오지 않아 나는 옥상에서/ 세상을 굽어보고 있었다 우리 집에 없는 꽃이/ 우리 집으로 꽃 냄새를 퍼뜨리고 있다/ 꽃 냄새가 잠으로 가는 통로를 가득 메우고 있다"
잠을 이루지 못한 화자는 세상을 굽어보고 있다. 그는 꽃 향기에 잠이 깬 것이 아니라, 잠을 이루지 못해 옥상에 나왔다가 달빛과 함께 퍼져 나오는 꽃 향기를 맡는다. 그는 옥탑방에 사는지도 모른다.
시의 화자 곧 서정적 주체가 시인과 늘 겹치는 것은 아니지만, 오독의 위험을 무릅쓰고 이 시의 화자를 시인으로 간주해보자. 시집 '낙타는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에 실린 다른 시 '달'에서 유추해보면, 시인에게 달은 바닥을 드러낸 우물이고 폐허의 공간이다. 그가 달을 보는 까닭은 달의 폐허가 그의 폐허를 읽기 때문이다. 그는 이루지 못할 꿈이 너무 많아 차마 지상을 예찬하지 못한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옥상에서 달빛을 받으며 세상을 굽어보는 '꽃 냄새가 있는 밤'의 화자-시인에게도 삶은 막막한 폐허일 수 있다. 그런데 꽃 냄새가 그를 잠으로 유혹한다.
"내 속으로 들어와 주무세요, 하고/ 꽃의 손길이 다가와서 유혹하는 밤이다." 시의 도입부에서 각성제였던 꽃 향기는 이제 반대로 수면제, 몽혼제가 된다. 그래서 시인은 말한다. "때론 생을/ 무언가에 취하게 하고 싶다/ 그 기회에 생의 길을 바꾸어도 좋으리라."
술이나 약물처럼 꽃 향기도 일종의 마취제다. 시인은 그 화향에 생을 취하게 하고 싶어한다. 그는 '무언가에 취하고 싶다'고 말하지 않고 '생을/ 무언가에 취하게 하고 싶다'고 말한다. 자신과 생 사이에 의식적으로 거리를 둘 만큼 그는 자신의 생에 몰입하지 못한다. 그는 생의 길이 바뀌어도 상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마침내 눈이 풀린 시인이 말한다. "이 밤,/ 꽃의 남편이 되어/ 꽃의 품속에서 하룻밤/ 푹 자고 싶다." 새롭게 떠오른 태양 아래서 화자의 삶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꽃 냄새에 취해 자고 싶어하는 화자는 백 수십 년 전 "이제 취할 시간이에요! 시간에게 학대 당하는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취하세요"라고 노래했던 보들레르의 후예다.
/편집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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