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m 길이의 커다란 벽면에 눈부신 파란색 LED(발광 다이오드) 숫자판 2,400여 개가 1에서 9까지의 수로 바뀌며 명멸한다. 다른 세계로 들어온 것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들지만 일순 LED가 내뿜는 빛이 모두 사라지고 전시장 전체가 캄캄해진다. 관람객 누군가가 작가가 몰래 설치해놓는 센서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1∼2분 암흑의 시간이 흐른 후, 마치 새로운 세계의 열림 혹은 생명의 탄생처럼 LED의 숫자들이 하나둘 깜박이며 밝아오기 시작한다. 일본의 설치미술가 미야지마 다쓰오(宮島達男·45)의 '메가 데스(Mega Death)'이다.
아트선재센터가 7일 시작해 11월 10일까지 여는 그의 개인전 '카운트 오브 라이프(Count of Life)'에 출품된 작품이다. 1999년 베니스비엔날레에 출품돼 20세기의 총체적 죽음을 상징한 작품으로 호평받은 설치이다.
미야지마는 그간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LED라는 테크놀로지와 동양적 철학을 접목한 작품들로 세계적 호평을 받고 있는 작가다. 백남준과 이우환의 명성을 잇는 아시아 작가로 꼽힌다. 이번 아트선재센터 전시회는 일본 미술가의 개인전으로는 국내 처음으로 열리는 것이기도 하다.
전시 제목 '카운트 오브 라이프'는 미야지마의 주제의식을 드러낸다. 불교나 선 사상에 기초한, 인간의 삶과 죽음과 관련된 시간의 문제에 대한 탐구이다. '메가 데스'에서 보듯 그는 1에서 9까지의 숫자만을 사용할뿐 0을 제외한다. 0은 그에게 실체가 없는 시간이다. 미야지마는 "0은 시간의 흐름에서 끝이 없음, 혹은 죽음 이후의 재탄생을 기다리는 시간"이라며 "내가 LED로 보여주는 1∼9의 숫자는 보이지 않는 삶의 시간의 흐름을 가시화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장 1층에는 일반 관람객이 그의 이런 주제의식을 체험할 수 있는 신작 '죽음의 시계'가 있다. 관람객이 컴퓨터로 자신이 죽기(살기) 원하는 시간을 입력한다. 이어 화면에는 관람객의 사진이 나타나고 앞으로 살 수 있는 시간이 0.1초 단위까지 나타나며 거꾸로 카운트다운된다. 살아야 할 시간과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시간이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며 주어진 앞으로의 시간을 재고해볼 것을 작가는 권하고 있다.
전시장 2층에는 대형 스크린 네 개로 구성된 '카운터 보이스 인 더 워터(Counter Voice in the Water)'라는 작품이 있다. 미야지마가 존경한다는 재일 화가 이우환과 그가 좋아한다는 한국 작가들 이불, 조덕현, 최재은, 최정화 등 8명의 퍼포먼스가 비디오로 나온다. 이들은 각각 9에서 1까지의 숫자를 하나하나 센 뒤 0을 세는 대신에 앞에 놓인 대야의 물에 머리를 담그는 행위를 반복한다.
이밖에 컴퓨터그래픽으로 처리한 1∼9의 숫자가 천장의 프로젝터를 통해 다양한 크기와 형태로 전시장 화면에 부유하는 작품 '떠도는 시간', 전시장의 유리벽을 이용한 '카운터 윈도우' 등 그의 작품들은 하나하나가 흥미롭다. 도쿄예술대에서 유화를 전공한 미야지마는 초기 1인 퍼포먼스 작업을 거쳐 1988년 '시간의 바다'라는 작품을 발표하며 LED작업을 계속해왔다. (02)733―8940
/하종오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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