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외 생활 8년 째인 1978년 12월 10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다. 나로서는 결코 놓칠 수 없는 재기의 기회였다. 이 때의 선거는 소선거구제가 아닌 한 선거구에서 두 사람을 뽑는 중선거구제로 실시됐다.나는 원외에서 고생을 한 데다 대구 중·서·북구에 뚜렷한 경합자가 없어 순조롭게 공천을 받았다. 그러나 선거를 앞두고 큰 일이 벌어졌다. 정부에서 안정적 세원을 확보하기 위해 부가가치세를 도입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국민들의 거부감은 대단했다. 부가가치세에 대한 홍보가 전혀 되지 않은 상태에서 국민들은 당장 세금이 늘어나는 데 대해 불만이 가득했다. 그렇잖아도 바닥까지 인기가 떨어진 공화당이 선거를 앞두고 도끼로 제 발등을 찍는 격이었다.
나는 당정회의에서 강력하게 따졌다. "물가를 자극하고 경제 혼란을 야기하는 세제를 힘으로 밀어 붙여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이미 대통령의 재가가 떨어진 상태였다. 말이 당정협의이지 사실은 사후통고나 마찬가지였다. 내 얘기는 그저 허공만 때릴 뿐이었다. 내가 당정회의에서 세제 변경에 반대했다는 얘기는 다음날 한 신문의 가십란에 보도돼 구설수에 올랐다. 박준규(朴浚圭) 정책위의장은 "왜 또 그런 발언을 해서 곤란을 자처하느냐"고 걱정을 해 주기도 했다.
이런 상황이어서 12·12 총선에서 나는 여당 후보의 프리미엄을 전혀 누리지 못했다. 오히려 정부에 대한 유권자의 불만 때문에 손해를 봤다. 결국 나는 야당 현역 의원이었지만 공천을 받지 못해 무소속으로 출마한 한병채(韓柄寀) 후보에 이어 2등으로 당선돼 겨우 3선 고지에 올라섰다.
8년간의 와신상담 끝에 이룬 재기였지만 마음은 그리 가볍지가 않았다. 민심이 점점 정권으로부터 떠나고 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선거 과정에서 이를 몇 번이고 확인했다. 1구 2인제 덕분에 의석수는 공화당 68석, 신민당 61석, 통일당 3석, 무소속 22석으로 공화당이 여전히 제1당이었지만 득표율은 신민당이 32.8%로 공화당의 31.7%를 앞섰다.
10대 선거가 끝나자 당은 일부 당직 개편을 단행했다. 당 의장에 박준규(朴浚圭) 의원, 중앙위의장에 육인수(陸寅修) 의원, 사무총장에 신형식(申泂植) 의원, 원내총무에 현오봉(玄梧鳳) 의원이 각각 임명됐다. 나는 3선 의원으로 당무위원이 됐다. 당시의 당무위원은 요즘과는 달리 10여명에 불과한 명실상부한 당의 최고 의결 기구였다.
해가 바뀌어 79년으로 접어 들었다. 10대 국회는 3월 개원 때부터 이른바 '백두진(白斗鎭) 파동'으로 삐걱거렸다. 공화당에서는 국회의장 후보로 유정회 출신인 백두진 의원을 내정했다. 도대체 민심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결정이었다.
야당은 거세게 반대하고 나섰다. "국민의 직접 선출에 의하지 않고 대통령이 지명한 유정회 의원이 국민의 대표성이 있다고 보는가? 이는 국회를 무시하고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다." 야당의 주장은 백번 옳았다. 당시 백 의장 내정을 두고는 차지철(車智澈) 경호실장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백 의원이 차 실장에게 찾아 가 부탁을 했고, 차 실장이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에게 강력하게 추천해 이뤄졌다는 것이다.
아무튼 의장 선거는 야당측에서 최고위원과 원내총무만 본회의에 참석한 가운데 간신히 치러졌다. 백 의원이 의장이 됐고, 여당에서는 민관식(閔寬植) 의원이, 야당에서는 고흥문(高興門) 의원이 각각 부의장으로 선출됐다.
나는 또 다시 공화당에 대해 깊은 회의에 빠져야 했다. "왜 이리도 정치가 어려워지는가. 여도 야도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사람을 굳이 무리를 해가면서까지 국회의장으로 뽑아야 하나. 상식에서 벗어난 강경과 무리수는 반드시 부작용을 낳는다는 사실을 왜 모른단 말인가."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왕 이렇게 된 바에야 할 말은 해야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그것만이 내가 공화당에 남은 목적이요, 동맥경화증에 걸린 공화당을 살리는 길이라 생각했다. 기회는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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