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최악의 피해를 기록한 태풍 '루사'는산업계에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 철도와 도로의 두절에 따른 물류난으로 많은 기업들이 추석 대목을 앞두고 화물수송과 원자재 확보에 큰 타격을 입고 있으며, 수해 지역의 기업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공장을 바라보며 복구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수해가 가장 심했던 경남 김해시 토정공단과 내삼농공단지, 강원도 시멘트 공장지대를 둘러보았다
■ 영동지방 한라·쌍용·동양 시멘트 3社
태풍 루사가 할퀴고 지나간 영동지방의 한라 쌍용 동양 등 시멘트 3사 공장은 하나같이 토사와 콘크리트 파편에 뒤덮여 마치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듯한 모습이었다. 전직원이 긴급복구에 나서 비지땀을 흘렸지만, 철도와 국도는 물론 공장 진입교량과 전용도로마저 무너져 악전고투하고 있다.
서울에서 출발한 지 사흘 만에 동해공장에 도착했다는 쌍용시멘트 이규봉(46) 업무지원팀장은 "이곳은 통신과 전기까지 두절돼 완전 고립되는 바람에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피해상황이 상상을 초월한다"면서 "복구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이송설비들이 주로 파괴돼 타격이 더 심하다"고 한숨을 쉬었다.
강릉시 한라시멘트 박종길(51) 대외협력부장도 "경기부양을 위한 관급공사 조기착공 등으로 시멘트 공급이 달리는 상황이었는데, 성수기를 앞두고 태풍이 덮쳐 심각한 시멘트 파동이 예상된다"며 "설비와 기간시설 복구에 3∼4개월은 족히 걸릴 전망이어서 재고물량만으로 수요를 따라잡기엔 한계가 있다"고 우려했다.
영동지역 시멘트 3사는 수일간 지속된 폭우로 생산라인과 자재창고가 대부분 침수돼 일부 생산라인을 제외하곤 가동이 전면 중단된 상태다. 특히 연간 생산량 1,050만톤으로 국내 최대규모인 쌍용시멘트는 전공장이 멈춰있다. 동해공장에서 북평항까지 반제품을 수송하는 벨트컨베이어 8.5㎞ 중 450m가 떨어져 나갔고, 전용도로 7.5㎞중 1.8㎞가 훼손됐다. 공장 내부의 생산설비보다는 이송 및 인프라시설의 피해가 더 심각하다. 대형설비들이 고지대에 위치해 공업용수용 송수관로와 일부 지하 생산설비만 침수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문 교량과 단지 내 산사태 지역까지 복구하려면 53억원 가량이 소요될 전망이다. 생산과 제품출하 중단으로 인한 영업손실액 (90억원)까지 포함하면 잠정 집계된 총 피해액이 150억원을 웃돈다.
이규봉 팀장은 "핵심 수송라인인 벨트컨베이어가 임시 복구되는 9월말까진 정상적인 시멘트 공급이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번 태풍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은 강릉시 라파즈한라시멘트 옥계공장(연간 740만톤 생산). 인근 주수천이 범람해 공장시설물 전체가 50㎝정도의 진흙뻘과 1.5m까지 차오른 빗물에 완전 침수됐다. 자재창고 벽면에는 물이 찼던 자국이 그대로 남아 당시의 참상을 전했고, 지하 설비실에는 아직도 물이 흥건히 고여 있었다.
산사태, 철도와 교각의 붕괴, 도로 유실 등으로 인한 피해액 62억원과 영업손실(220억원)까지 포함하면 총피해액은 500억원을 훌쩍 넘는다. 더욱이 직원 아파트 1층이 침수돼 직원 상당수가 수재민인 형편이어서 복구에 이중고를 겪고 있다.
삼척의 동양시멘트는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어 9일부터 가동을 재개하지만 시멘트 수요를 커버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동해=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 김해 토정공단·내삼농공단지
"한 달이 지났지만 공장가동은 엄두도 못내고 있습니다." 8월 10일부터 11일 간 6m 높이로 침수되는 수해를 입은 경남 김해지역. 이곳 한림면 토정공업단지와 주촌면 내삼농공단지의 100여 중소기업은 이번 수해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7일 오전, 물이 빠진 지 보름이 지났지만 토정공단 입구는 기계부품, 나무자재 등 수백 톤의 산업쓰레기로 가득했다. 공장 내부에는 벌겋게 부식된 기계들과 미처 버리지 못한 파손된 자재들이 마치 시위하듯 덩그러니 남아 있다.
40여업체가 수해를 입은 토정공단의 가구조립업체 우드뱅크의 김병두(49)사장은 "기계들이 썩어가고 있으나 인력부족으로 공장가동은 제쳐 두고 수리조차 어려운 실정"이라고 전했다. 무려 880억원의 피해를 입은 이웃한 내삼농공단지에선 절개지가 무너져 내려 삼흥금속 등 4개 공장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곳 비상대책위원회 주보원(49) 위원장은 "김해시가 1996년 농공단지를 조성하면서 무리하게 산허리를 깎아 피해를 키웠다"며 "보수공사를 수차례 건의했지만 무시됐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이 지역 기업인들에게 전력, 인력, 자금 등 모든 게 부족했지만, 무엇보다 기업하려는 의욕을 잃은 게 가장 큰 상처처럼 보였다.
토정공단의 경우 1차 피해액은 중소기업 33곳의 334억원. 그러나 40여개 영세 중소업체들은 피해산정이 어려운 실정이고, 복구가 지연되면서 피해액은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 업체들은 정부의 재해대책 지정이 늦어지고, 자금지원도 한계가 있어 조만간 자금난에 따른 부도피해가 잇따를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자동차용 부품을 만드는 대영산업(주) 한장순(44) 사장은 "피해액 11억원 중 5억원은 간신히 저금리대출로 막았지만 기계는 고장났고, 어음만기는 다가오고 있다"며 "하루 빨리 일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11억원의 피해를 입은 고려포리(주) 오상제(53) 사장은 "섬유를 미국, 일본에 수출 중인데 바이어들이 수해를 알까 봐 쉬쉬하고 있다"면서 "다른 업체의 경우 납기일을 맞추지 못해 수출계약이 취소되는 사태가 발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비슷한 처지에 내몰린 김해지역 수해 기업들도 시설복구보다는 자금지원 등 실효성 있는 대책을 고대하고 있다. 52개 중소업체들이 만든 토정·진말공단 수해대책위 최철호 위원장(C&H사장)은 "중소기업은 대기업과 달리 방재시설을 두기 어려워 피해가 크지만, 재해대책법은 지원대상에서 중소기업을 제외시켰다"며 "한시가 급한데 당국은 관련법류의 미비를 이유로 지원을 계속 미루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김해지역 상공인들은 "최근 불황으로 가뜩이나 빈사상태에 빠져있던 지역경제가 수해로 회생불능의 타격을 입을까 우려된다"고 입을 모았다.
/김해=고성호기자 sungho@hk.co.kr 김명수기자 lecero@hk.co.kr
■산업계 피해/물류난 장기화 원자재값 들먹
수해가 산업계에 가한 직접적인 피해는 물류파동과 원자재 수급난. 특히 추석을 앞두고 빚어진 물류난은 원자재 가격상승과 물가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전망이다.
수해 직후 수출입 화물의 경우 경부선의 단선운행으로 육로를 통한 수도권-부산항 컨테이너 수송비용이 한때 40만원선에서 60만원대로 뛰기도 했다. 물론 복구작업이 활발히 진행되면서 물류소통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경기 의왕시에 있는 내륙 컨테이너기지 경인ICD측은 "4일부터 경부선 화물수송을 정상화해 30%를 밑돌던 하루 상·하행선 수송량이 평소 1,500여TEU(20피트 컨테이너 1개)를 회복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추석 연휴를 앞두고 보통 화물량이 30%가까이 증가하는 만큼 일부 물류난은 불가피할 전망. 택배수송의 경우 강원도 영동지역과, 경북 북부지역 배달이 불가능해 업체마다 미배달 화물이 수천개씩 쌓여 있다. 사정은 수출화물도 마찬가지여서 부산항 컨테이너 부두의 한진해운 김시복 차장은 "수출화물이 제 때 처리되지 못해 보통 1주일이상 늦게 선적되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영동지역 3개공장의 수해로 생산시설의 50%가 가동중단된 시멘트 업계의 경우 파동까지는 아니지만, 수급차질이 빚어지고 있다. 산자부는 "가동률 80%를 밑돌던 생산시설중 내륙에 위치한 5개 공장을 풀가동하고, 피해공장의 복구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며 "시멘트 파동의 조짐은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추석부터 10,11월에 이르는 기간은 하반기 최고 시멘트 성수기인 데다 기존 수요외에 수해 복구에 필요한 시멘트 수요도 상당할 것으로 예상돼 파장이 클 것으로 업계 관계자들은 내다보고 있다.
/이태규기자 tg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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